“‘여자 영화는 안 돼’라는 시선이 많았어요. 그때 그 카피가 떠오르더라고요. 영화 ‘차이나타운’에서 김혜수 선배님이 김고은씨한테 그러잖아요. ‘증명해봐, 네가 쓸모 있다는 걸.’ 그런 느낌이었어요. 장르적인 재미가 있는 영화인데 여자가 나온다고 해서 만들어지면 안 될 이유는 없잖아요. 그래서 잘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배우 엄지원(39)이 결국 해냈다. 것도 아주 당당하고 멋지게. 귀하디귀한 여배우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를 세상에 내놓았고, 그 가치를 증명해보였다. 보는 이마다 호평 일색. 누적 관객수는 개봉 17일 만에 111만명(영진위·17일 발표)을 넘어섰다.
영화는 이 시대 여성들이 겪어내고 있는 현실에 대해 다룬다.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 지선(엄지원)과 낯선 타국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중국인 보모 한매(공효진)의 삶을 조명한다. 한매가 아이를 데리고 사라지면서 스릴러로 흐르는데, 결국 두 여자가 연대함으로써 작품의 의미는 완성된다.
극 중 엄지원은 뛰고 또 뛴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와중에 홀로 아이를 찾으려 분투한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엄지원은 “지선은 굉장히 현실적인 인물이었고 마치 나 같았다”며 “하지만 그를 연기하는 건 너무 고독한 싸움이었다”고 했다.
“남성적인 시선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애 키운다고 돈 벌러 나가면서 일에 치여서 정작 애를 잘 돌보지는 않는다’고. 근데 그건 모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사회가 지선에게 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못한 거죠. 돈 벌러 나가는 게 지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거예요. 돈이 없으면 아이를 키울 수 없으니까.”
적은 예산? 빠듯한 촬영 스케줄? 육체적인 고통? 무엇보다 엄지원을 고단하게 한 건 지선을 향한 부정적인 시선들이었다. 그는 “초반 지선 캐릭터에 쏟아졌던 비난의 화살이 마치 저를 향한 것 같았다. ‘네가 잘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남자 스태프들과 의견이 달랐어요. ‘재미있게 만들자’는 공동의 목표는 있었지만 남성들은 ‘모성’으로 끝나길 바랐고, 저랑 (공)효진이랑 감독님은 여성이 남는 영화가 됐으면 했어요. 방향이 달랐던 거죠. 남성 시선의 영화들이 많이 제작돼왔기 때문에 그 화법에 익숙해진 거예요. 여성의 시각에서 또 다르게 풀어낼 수 있는 건 결국 여자(감독과 배우)라고 생각했어요.”
엄지원은 “대한민국에서 여배우로 십여년 살면서 여자 영화를 만난 건 거의 처음”이라며 “그래서 남다른 책임감이 있었고, 배우로서 일하면서 이렇게 사회상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는 데에서도 큰 사명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재미있는 영화잖아요. 장르적으로 충분히 미덕이 있어요. 제작 환경은 녹록치 않았지만, 그래도 이 작품이 재미있게 만들어지면 다음 영화가 나오는 기회가 될 거라 믿었어요.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여배우로서, 저도 어떻게 보면 ‘영화판의 지선’이잖아요. 지선이 사회를 향해서 달려가는 것처럼 엄지원도 여배우의 길을 향해 나아가고 싶은 꿈과 의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최근 돋보이는 활약을 이어가고 있는 엄지원은 곧바로 오는 21일 차기작 ‘마스터’를 선보이게 됐다. ‘미씽’과는 극명하게 다른 색깔의 작품이다. 이병헌 강동원 김우빈 등 충무로 대표 남배우들을 앞세운 영화는 흥행 요소들을 충실히 갖춘 초대형 기대작이다.
엄지원은 “‘미씽’은 가난한 집인 반면 ‘마스터’는 아주 부잣집”이라며 “‘미씽’이 현실에 맞닿아있는 이야기였다면 ‘마스터’는 사회비판적인 시선을 상업적으로 재미있게 풀어낸 통쾌한 오락물”이라고 설명했다. 극 중 맡은 역은 강직한 여형사 신젬마. 인물에 대한 긴 설명을 보태는 것 대신 그는 직접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어 캐릭터 예고 영상을 틀어줬다.
“이런 느낌이에요. 멘탈이 아주 건강하죠? ‘마스터’를 찍고 나서 ‘이런 작품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건강하고 밝고 시원시원한 거. 내 개인적인 행복을 위해서라도 당분간 밝은 영화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어요(웃음).”
전작 ‘소원’(2013)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2014) ‘더 폰’(2015) 등에서 매번 다른 얼굴을 보여줬던 그다. 변화를 통해 재미를 찾는 것일까. 그보다는 “이미 해봤던 이미지를 다시 답습하고 싶지는 않다”는 게 엄지원의 말이다.
“아무래도 최근작에서의 이미지와 가장 비슷한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와요. 엄마면 쭉 엄마, 푼수면 쭉 푼수, 그런 식으로요. 저는 늘 조금이라도 새로운 걸 선택하려는 편이에요. 다 다르게 해보고 싶어요.”
과거 인터뷰에서 “괴물 같은 연기를 한 번 해보고 싶다”던 다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은퇴 전에는 꼭 해야 될 텐데 걱정이에요. 일단 말은 뱉었으니까. ‘도대체 언제 하는 거야’ 막 이러시는 거 아니에요? 하하. 언젠가 꼭 해보겠습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