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포함한 아프리카 난민 300명을 태운 파란 트롤선(저인망어선)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라시드 항구를 출발한 것은 지난 4월 8일이었다. 난민들은 이탈리아로 향하는 이 배를 타기 위해 밀수업자들에게 2000달러(약 233만7000원)씩을 건넸다. 배는 또 다른 어선에 타고 있던 난민 200명을 함께 태울 계획이었다. 그러나 난민들이 옮겨 타는 과정에서 기울어진 배는 이튿날인 9일 오전 2시 결국 전복됐다.
지중해에 내쳐진 난민들은 아랍어, 소말리아어, 아판 오로모어로 제각기 도움을 외치며 절규했다. 그러나 어선은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난민 100여 명을 뒤로 한 채 줄행랑쳤다. 일부 생존자들이 바다에 빠진 난민들을 구하려고 했지만 밀수업자가 흉기로 위협하는 바람에 구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생존자 37명을 제외하고 최소 500명이 익사했다. 올들어 지중해에서 발생한 난민선 침몰 사고중 가장 규모가 컸다. 그런데 그 어떤 공식 기관도 조사에 나서지 않았다. 난민선의 당초 목적지였던 이탈리아도, 생존자들이 도착한 그리스도, 배가 출발한 이집트도 외면했다. UN이나 EU도 마찬가지였다.
이집트로 송환되는 것을 두려워한 밀수업자들이 자신들이 리비아에서 왔다고 속인 것이 화근이었다. 사고 며칠 뒤 며칠 뒤 유엔난민기구(UNHCR)는 그리스에 도착한 생존자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사고 선박이 리비아에서 출발했다고 발표했다. BBC뉴스나이트가 취재한 내용을 UN측에 제시했으나 UN은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조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UNHCR은 법 집행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해양 재난이나 초국가적 조직 범죄를 조사하는 것은 우리 영역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리스는 국경 내의 범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수사에 착수할 수 없다고 했다. 이집트 정부는 난민선이 침몰한 사실이나, 이 배가 자국 항구에서 출항한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많은 희생자 유가족들은 불확실한 상황에 처해 있다.
지난 7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법원은 궐석재판에서 7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과실치사나 살인죄를 적용하지 않고 형량이 훨씬 가벼운 사기 혐의를 적용했다. 유죄판결을 받은 피고들은 아직 체포조차 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집트 법무부는 BBC 뉴스나이트에 불법 이주문제를 다루는 새 법이 지난 달 비준됐다면서 “4월 난민선 침몰 사고에 대해 어떤 조사를 했는지는 말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이런 범죄가 발생한 사실이 입증되면 이집트 정부는 진상 규명을 위한 조사를 지체 없이 시작하겠다”고 했다.
BBC와 로이터는 이 사건을 ‘잊혀진 난파선(The forgotten shipwreck)'이라는 제목의 심층 기사에 담아 6일 동시 보도했다. 수개월 간 생존자들과 유가족, 난민 밀수업자와 브로커까지 접촉해 취재한 결과다.
롭 웨인라이트 유로폴 국장은 이 사건이 ‘불편했다’며 “확실한 답은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므로 다시 들여다보겠다”고 밝혔다. 유엔난민기구는 올해 지중해를 건너다 숨진 난민 수가 4663명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역대 최다 사망자다. BBC는 “이런 상황인데도 난파 사고에 대한 조사는 자주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며 "밀수업자만 배를 불리고 난민들은 계속 익사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