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새누리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던 2012년 11월 25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제18대 대통령선거 후보 등록시간에 맞춰 기자회견을 열었다.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대선 출마를 선언하기 위해서였다.
투표일까지 남은 기간은 25일. 하지만 승리를 낙관할 수 없었다.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문재인 전 대표와의 지지율 차이는 오차범위 안에 있었다. 여론조사 기관마다 달랐지만 두 후보의 지지율은 모두 40%대 초반이었다.
박 대통령은 긴장한 표정으로 단상에 섰다. 기자들의 눈과 카메라는 온통 박 대통령을 향하고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곳곳에서 터졌다. 박 대통령은 결심한 듯 굳게 다문 입을 열고 단호한 어조로 선언문을 낭독했다.
“모든 국민의 꿈이 이뤄지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저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국민의 선택을 받으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로 지난 15년간 국민의 애환과 기쁨을 같이 나누었던 대통령직을 사퇴합니다.”
시작부터 헛말이 나왔다. 대선후보가 아직 손에 넣지 못한 대통령직을 내려놓겠다는 이 웃지 못 할 상황은 기자회견장의 적막을 깼다. 곳곳에서 “어?” “뭐라고 했지?” “대통령직을 사퇴한다고…”라는 말이 새어나왔다. 그 순간 박 대통령의 표정을 포착하려는 카메라의 플래시는 번개처럼 터졌다.
박 대통령은 덤덤하게 “국회의원직을 사퇴합니다”라고 발언을 정정했다. 하지만 실언은 이미 전국의 텔레비전과 라디오에 실시간으로 전해진 뒤였다. 박 대통령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제가 뭐라고 그랬죠?”라고 기자들에게 되물었지만,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국가 최고 권력자, 혹은 그 자리에 도전하는 사람의 어리숙한 실언만큼 좋은 ‘떡밥(인터넷의 화젯거리)’은 없었다. 당연히 패러디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그 장면을 복기하며 웃었다. 냉소와 조롱이 대부분이지만, 가끔씩 준엄한 비판을 담은 패러디도 나왔다.
유튜브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인디뮤지션 더훗(The HOOT·본명 이주용)의 뮤직비디오 ‘저기 그러니까 그 뭐시냐 제가 아무튼 고심 끝에 대통령직을 사퇴합니다’는 그 중 하나다. 박 대통령이 서울에서 150만명, 전국적으로 190만명이 모여 ‘하야’를 외친 촛불정국 속에서도 4년 전 실언과 다르게 ‘대통령직 사퇴’를 말하지 않고 국회에 거취를 맡긴 지금, 이 뮤직비디오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이 뮤직비디오는 박 대통령이 제3차 대국민담화를 통해 “진퇴 문제를 국회에 맡기겠다”고 말한 29일 오후부터 퍼졌다. 박 대통령의 발언을 절묘하게 조합해 각색한 패러디에 가깝지만, 음악적 완성도가 높아 호응을 얻었다. 아직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인디뮤지션의 신선함과 패러디의 완성도가 전파의 속도를 높였다.
유튜브 최초 등록일은 3월 27일. 지금까지 15만5000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더훗은 4월 13일 총선을 앞두고 이 영상을 제작했지만, 박 대통령의 제3차 대국민담화 이후부터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
유튜브 댓글 게시판에는 “숨넘어갈 정도로 웃었다” “묵직한 팩트폭력” “박 대통령에게서 진짜 듣고 싶은 말”이라는 의견과 함께 “국정농단 세력의 지휘를 받은 누군가로부터 잡혀간 것이 아니냐” “영상이 삭제되거나 제작자가 잡혀가기 전에 순례하고 가겠다”는 우려도 많았다.
다행히 더훗은 우려와 다르게 30일 국민일보 기자의 전화를 받았다. 더훗은 전화통화에서 “당연히 비판적 시각을 담아 제작한 영상”이라며 “평소 추구하는 록메탈에 영상을 입혀 가볍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두렵기도 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예술인이라고 생각한다면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는 자기검열과 공포심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이 뮤직비디오에 대한 찬반 입장과는 별개로 누구든 신념을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술인이라고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반대 입장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