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 쓰레기더미서 싹튼 희망… 마르쉘과 아버지 이야기

입력 2016-11-28 17:04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당하는 자를 변호해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니이다.”(시 140:12)

고난은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그곳마다 하나님 뜻에 따라 고난당한 자에게 손길을 내미는 사람을 목격한다. 국민일보는 지난 21일부터 나흘간 필리핀 세부를 찾았다. 열악한 그곳에서도 작지만 소중한 희망을 심는 하나님의 자식들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구루병을 앓는 마르쉘과 한 쪽 눈을 잃은 아버지. 사진=최기영 기자

숨이 턱 막혔다. 지난 22일 오후 3시(현지시간) 필리핀 세부지역 마다우에 쓰레기집결장. 작렬하는 태양이 수십만톤의 쓰레기를 내려 쪼이고 있었다. 사방에 진동하는 악취. 발 디딜 때마다 땅은 스멀스멀 내려앉았다. 웅덩이를 잘못 밟으면 여지없이 시커먼 구정물이 신발을 덮었다. 동행한 밀알복지재단(이사장 홍정길 목사) 세부 막탄 지부장 황영희(54·여) 선교사는 “쓰레기 위에 흙을 수없이 덮어놔서 수백 겹 쓰레기 단층이 있다”고 설명해줬다.

세부는 우리에겐 필리핀 최고의 관광지로 알려진 곳이다. 깨끗한 바다와 깔끔한 호텔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을 것 같았지만, 바로 그 옆에서 민낯이 드러났다. 이곳의 쓰레기가 전부 모이는 마다에우 말이다.

구루병을 앓는 마르쉘과 한 쪽 눈을 잃은 아버지. 사진=최기영 기자

메케한 먼지를 뿜어내며 덤프트럭이 쓰레기를 쏟아내면 사람들이 달려들어 보물 찾듯 쓰레기를 뒤진다. 주민들에겐 쓰레기더미 속 플라스틱과 유리병이 생계수단이다.

멀찌감치 쓰레기산을 넘어오는 한 남자가 보였다. 학교를 마친 딸 마르쉘(12)을 데리고 일터로 오는 파블리토 빈쿨라도(55)씨. 부녀의 모습에 다시 숨이 막혔다. 오른쪽 눈이 없는 남자는 간신히 아이의 다리를 붙들고 있었다. 구루병을 앓는 아이의 모습은 더 충격적이었다. 왼쪽 다리는 무릎과 발목이 거의 붙었고, 오른쪽 종아리는 ‘ㄱ’자로 꺾여 있었다.

빈쿨라도씨의 일터는 쓰레기더미 위다. 방수포를 대나무 4개에 엉성하게 묶어둔 천막 안에 음료수 몇 병과 빵 몇 조각이 그의 노점이다. 2014년 8월 황 선교사를 만나기 전까지 만해도 마르쉘은 배로 기어 다니며 쓰레기 사이에서 재활용품을 찾아다녀야 했다.

이 마을엔 마르쉘 가족 외에도 600여 가정이 생활하고 있다. 3년 전만해도 부모들은 오물사이에서 생계를 이어가고, 아이들은 쓰레기에 방치됐다. 그러다 마을 입구에 갈릴리교회(에드가 아라비스 담임목사)가 들어섰고, 주민들의 유일한 안식처가 됐다. 매주 화요일 저녁이면 교회에선 닭스프 파티가 열린다. 닭고기와 쌀을 넣어 끓인 스프의 구수한 냄새가 피어오르면 잠시나마 쓰레기의 악취는 사라진다.

이날도 어김없이 150명의 주민이 거의 다 모여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교회는 가정에서 방치됐던 아이들의 보육과 교육을 책임지고, 장애 및 빈곤 아동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주고 있다. 아라비스 목사는 “밀알복지재단의 도움으로 교회가 세워지면서 여기서도 희망이 꽃 피울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구루병을 앓는 마르쉘과 한 쪽 눈을 잃은 아버지. 사진=최기영 기자

그 사이 황 선교사는 마르쉘네 이야기를 잔잔하게 전해줬다. “한 쪽 눈을 잃은 아버지와 두 다리를 없다시피 한 딸에게 어떻게 희망을 줄지 고민하다가 노점을 차려줬죠.”

그는 “아버지가 워낙 성실해 노점 차릴 때 사줬던 물건 값을 5개월 만에 다 갚았다”고 했다. 황 선교사 곁에서 마르쉘은 “장애아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며 활짝 웃었다. 낮은 곳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식들이 있었다.

세부=최기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