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 답답해 코앞에서 말해주러 나왔다”
이날 서울에는 오전부터 첫눈이 내렸다. 낮 12시,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인근에서 경찰들은 집회 관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자동 로터리부터 주민센터까지 올라가는 자하문로 우측(청와대쪽) 길가에는 경찰 대형버스가 줄줄이 늘어서있었다. 주민센터가 있는 신교동 로터리에서 청와대 방향인 효자동 삼거리로 향하는 길목은 이미 경찰 버스가 막고 있었다. 의경들은 경찰 버스에서 내려 인근 편의점에 가거나 점심용 도시락을 나르고 있었다.
오후 1시30분이 되자 경찰은 청와대로 향하는 신교동 로터리 길목에 ‘이 선을 넘지 마시오’라고 적힌 노란색 플라스틱 펜스를 두어 폴리스라인을 설치했다. 청와대로 향하는 골목골목마다 경찰들이 배치돼 경계 태세를 유지했다. 등산복 차림의 시민들도 아직 곳곳에서 보였다.
오후 2시가 되자 주민 센터 맞은편에 시민들이 나타났다. 시민 30여명은 우비를 입은 채 각종 손 팻말을 들고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구호를 외기치 시작했다. ‘박근혜를 몰아내자’ ‘박근혜를 구속하라’는 구호도 나왔다.
주민센터 맞은편 인도에서 구호를 외치던 김응열(50)씨는 “여기까지 올라와 외치는 건 광화문에서 외치는 것과 확실히 다르다. 가까이에서 외쳐야 들리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어 “매주 나오고 있는데 사생활이 없어 힘들어 죽겠다. 제발 그만 좀 내려오라”고 했다.
유모(58)씨도 “박 대통령이 귀를 막고 있는 것 같아 너무 답답하다. 그래서 이렇게 코앞에서 외치고 싶었다. 직접 소리를 들으면 좀 생각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유씨는 방수 점퍼까지 입고 있었다. 홍원기(22)씨도 “목소리를 직접 전달하고 싶어 여기까지 올라왔다. 박 대통령이 드라마를 보고 있지 않다면 이 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경찰은 오후 2시20분쯤 ‘평화로운 집회, 성숙한 시민의식, 여러분이 지켜주세요!’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경찰 차벽 위에 내걸었다. 시민들이 점점 늘어나자 차벽 앞 경력도 늘렸다. 폴리스라인과 차벽 사이에 경찰 100여명이 모였다.
촛불 막아선 차벽 너머…적막한 청와대
주민센터 맞은편 인도에 모인 시민 100여명은 오후 3시30분쯤 횡단보도를 건너 신교동 로터리를 점거했다. 청와대로 향하는 길목을 막고 있는 폴리스라인 앞까지 가서 경찰과 대치했다. 일부 시민들은 경찰을 향해 “왜 범죄자를 지켜주고 있냐”고 항의했다.
최원영(38)씨는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할 아들 찬민(7)군과 함께 주민센터 앞에 올랐다. 아들은 ‘박근혜 하야’라고 적힌 손 팻말을 들고 최씨 어깨 위에 목마를 타고 청와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씨는 아들에게 “여기서 200m만 더 가면 대통령이 있는 청와대야. 우리 집에서 편의점 가는 거리 정도 돼”라고 이 장소에 대해 쉽게 설명해줬다. 최씨는 “초등학생들도 아는 잘못을 박 대통령만 모르고 있다. 앞으로는 이렇게 큰 집회가 없을 것 같아서 역사 교육 차원에서 아들을 데리고 나왔다. 아이들에게도 민주적인 집회의 모습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오후 4시가 되자 내자동 로터리 쪽에서부터 북소리가 들려왔다. 행진 선두를 알리는 깃발도 여럿 보였다. 행진대열이 올라오자 신교동 교차로에 모여 있던 시민 300여명이 환호로 이들을 맞이해줬다. 시민들은 청와대를 향해 수차례 함성을 지르고 자유 발언을 시작했다.
시민들과 대치하고 있던 경찰들은 대부분 무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시민들이 방송 차에서 재밌는 발언을 하면 힐끔힐끔 바라보기도 했다. 한 고등학생이 방송 차에 올라 “박 대통령의 일본 이름이 뭔지 아냐. 하야꼬 하야꼬 꼬기오다”라고 말하자 시민들이 폭소했다. 뒷줄에 서있던 경찰들도 피식피식 웃음을 띠거나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자유발언자를 바라봤다.
오후 5시쯤 인건 건물 옥상에 올라가 바라보니 경찰 차벽을 중심으로 시민들이 모여 있는 거리와 차벽 너머의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시민들은 촛불을 밝히며 분주히 오갔는데, 차벽 너머는 적막했다. 청와대 인근에는 안개가 자욱이 껴있었고, 주변에는 주황색 가로등 불빛만 보였다.
법원이 행진을 허가한 오후 5시30분을 넘기자 시민들은 다시 광화문 광장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함께 ‘하여가’ 노래를 부르며 질서 정연하게 온 길을 되돌아갔다.
“경찰이 허락하는 집회만 하진 않겠다” 밤늦도록 주민센터 맴도는 촛불들
시민 100여명은 물러서지 않고 신교동 로터리를 지켰다. ‘시민불복종행동’이라고 적힌 깃발과 플래카드가 보였다. 인터넷에서 처음으로 이 모임을 제안한 엄재희(27)씨는 “촛불 집회가 평화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지금은 비폭력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 보수 언론이 씌운 평화 프레임에 걸린 게 아닌가 싶다”며 “순종적인 집회 태도에 대한 반발로 대안적인 시위 문화를 찾기 위해 모였다”고 설명했다. 인터넷에서 모인 회원 20여명이 경찰의 해산 명령에도 굴하지 않고 ‘불복종’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맞섰다. 시민들도 ‘불법차벽 철거하라’ ‘행진권을 보장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경찰에 항의했다.
한 시간 정도 상황을 지켜본 경찰은 오후 6시30분쯤부터 교차로 한가운데로 나와 시민들을 밀어냈다. 시민들이 스크럼을 짜 버텨봤지만 숫자가 적어 큰 의미는 없었다. 경찰들이 몰려나와 거리를 점거하자 시민들은 경찰 사이사이에 고립되면서 자연스럽게 인도로 밀려났다. 경찰은 시민들을 모두 인도로 내몬 뒤 차벽을 세웠다.
일부 시민들은 광화문 광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주민센터 인근을 맴돌았다. 윤아정(21·여)씨는 오후 7시까지 주민센터 주변을 서성였다. 윤씨는 “광화문에서 노래 부르는 것 보다 여기서 소리 지르는 게 더 날 것 같아서 남아있다”며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은 단원고 학생들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봤는데 너무 슬퍼서 도저히 못 내려가겠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폭력 시위를 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윤씨는 “친구들 가운데 의경으로 입대한 친구들도 많다. 의경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나. 그냥 답답한 마음에 주변을 서성인다”고 했다.
충남 당진에서 올라온 회사원 권모(55)씨는 경찰들을 향해 ‘내려와 박근혜’라고 적힌 손 팻말을 맨손으로 들고 서있었다. 권씨는 “그냥 마지막까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의견을 전달하고 싶어 여기 남아있다. 작은 힘이지만 선두에서 힘을 보태고 싶다”고 했다. 이어 “폭력 프레임에 빠지지 말자는데 달리 방법도 없다. 경찰이 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래저래 마음이 찡하다. 빨리 좀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성경(28·여)씨는 led 촛불을 들고 경찰 차벽 앞에 앉아있었다. 박씨는 “어떻게 (물리적으로) 해보려는 게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계속 목소리를 내고 싶어 남아있다. 경찰이 제시하는 가이드라인 안에서만 집회를 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메시지도 전달하고 싶다”고 말했다.
회사원 박모(43)씨도 홀로 ‘박근혜 내려와’라고 적힌 손 팻말을 들고 경찰 차벽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박씨는 “경찰이 차벽을 쳤지만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물러나는 게 아쉽다”며 “마치 가이드라인처럼 경찰 차벽 밖에만 있어야 하는 게 맞는지 고민이 된다. 평화 집회 기조도 나름대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뭔가 획일화 된 집회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다. 다양한 방법의 집회 방식에 대해서고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민모(25·여)씨도 손 팻말을 들고 경찰 차벽을 한참 바라봤다. 민씨는 “경찰의 집회 해산이 마치 ‘여기 끝났으니 광화문 가서 조용히 알아서 찌그러져있다 가라’는 느낌이 들어 얄밉다”면서 “현실적으로 청와대 앞까지는 못가겠지만 그렇다고 광화문 광장으로 가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집회 때문에 손님 줄어도 시민들을 응원합니다
인근 상인들도 고민이 많다. 매주 토요일 열리는 집회 때문에 손님이 크게 줄었는데 그렇다고 집회 참가자들을 나무랄 수도 없다. 주민센터 근처에서 ‘하늘돈까스’라는 음식점을 운영하는 현정(48·여)씨도 그렇다. 보통 토요일에는 서촌과 윤동주문학관을 찾는 손님들이 이 식당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하지만 촛불 집회가 열린 뒤로는 손님이 확 줄었다. 100만원이 넘는 월세를 내기도 빠듯한 상황이다. 간간히 집회 참가자들만 이 식당을 찾는다.
그래도 현씨는 집회 참가자들을 응원한다고 한다. 그래서 집회가 열리는 토요일에는 모든 메뉴를 1000원씩 할인해준다. 현씨는 “멀리 지방에서 여기까지 올라와 집회에 참가하고 밥을 먹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뭉클해진다”며 “장사가 좀 안돼도 시민들을 응원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주에는 김밥 80줄을 주변 의경들에게 기부하기도 했다. 아들 같은 의경들이 거리에 앉아 차가운 도시락을 먹는 것을 보고 마음이 쓰였다고 한다.
통인동에 있는 카페 ‘통인동 커피공방’도 ‘9년 만에 처음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집회 참가한 시민들에게 무료로 따뜻한 차를 나눠주고 있었다.
오후 8시가 되자 주민센터 인근을 지키던 경찰들은 다른 곳으로 떠났고, 거리에는 경찰 버스만 덩그러니 남았다. 인도에 남아있던 시민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자하문로를 따라 내자동 쪽으로 걸어 내려왔다. 경찰 버스가 줄줄이 인도 옆에 놓여있었다. 버스와 버스 사이로 텅 빈 도로와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경찰들의 모습이 간간히 보였다. 경찰 차벽이 세워져있는 통인로터리에 다가가자 시민들의 집회 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김판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