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1.
지난 2012년 2번의 시도 끝에 탈북에 성공한 김영란(35·여·가명)씨는 하루하루가 즐겁다. 중국을 거쳐 남한에 오는 여정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동경해온 ‘간호사’의 꿈을 이뤄가고 있어서다. 당시 11살이던 아들(15·중2)과 함께 탈북을 결행한 김씨는 광주광역시에 정착하고 모 사설학원에서 1년 과정의 간호조무사 교육을 성실하게 받았다. 이후 광천동의 한 안과병원에서 2014년부터 착실히 간호경력을 쌓고 있다. 직장 근무를 마친 뒤에는 조선이공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야간 강의를 열심히 듣는다. 향후 여건이 허락하면 4년제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조무사가 아닌 정식 간호사로 취업한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11평짜리 비좁은 영구임대아파트에서 200만원도 되지 않는 박봉으로 생활을 꾸리지만 김씨는 간호사가 될 날만 떠올리면 행복하다. 김씨는 아들과 함께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사례 2.
혈혈단신으로 2006년 남한에 온 이영희(46·여·가명)씨는 전남 목포에서 외롭게 살다가 2010년 늦깎이 결혼을 하게 됐다. 광주로 이사온 이씨는 남편과 힘을 합쳐 새로 시작한 재활용자원 수집사업의 수입이 쏠쏠해 현재 145㎡의 아파트에 살면서 어엿한 중산층으로서 생활하고 있다. 연간 수입만 9000만원에 달한다. 이씨는 “북한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던 인생을 살고 있다”며 “북한에 남겨둔 언니와 오빠 남동생까지 남한으로 데려왔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했다.
#사례 3.
지난 2001년 지인의 도움을 받아 남한에 홀로 입국한 박송자(39·가명)씨는 학구열에 불타 늦은 나이에도 전남대학교를 졸업했다. 대학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면서 사귀던 남편과 2002년 결혼해 2명의 자녀를 낳는 등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한 때 회계사무실에 근무했던 박씨는 2014년 광주시가 탈북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지방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모 구청에 근무 중이다. 박씨는 “동사무소에 근무할 때는 주민등록 등초본 발급 등 행정용어가 낯설어 민원인들에게 신속한 대응을 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며 “공무원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아이들을 훌륭히 키우는 현모양처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사례4.
2년여 전 수개월간 태국에서 체류하다가 남한 땅을 밟은 이모(47·여)씨는 요즘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다. 딸과 함께 탈북에 성공한 기쁨을 누린 것은 잠시에 불과했다.
극심한 생활고와 탈북에 따른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이씨는 지난해 간이식 수술을 받았다. 북한에서 앓던 간염, 간경화가 악화돼 말기 간암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건강관리공단에서 수술비 등 간이식에 필요한 4000만원 중 2000만원을 부담하고 남북하나재단이 800만원을 지원해줬지만 그뿐이었다. 이씨는 4시간여의 ‘간이식’ 수술을 받았으나 극심한 후유증으로 식당 잡역부 일도 나가지 못하는 등 정상적 생활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동반 탈북한 딸은 서울 모 명문대에 무난히 합격했지만 이씨는 금지옥엽 키워온 딸이 배필을 만나 가정을 이룰 때까지 뒷바라지를 할 수 있게 될지 걱정이 태산이다. 이씨는 아픈 몸에도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갈수록 늘고 있다.
‘의사는 물론 간호사와 공무원부터 무직자, 말기간암 환자까지...’.
광주지역 탈북자들의 명암이 엇갈리고 있다. 저마다 영위하는 삶이 닮을 수는 있지만 생사의 경계선인 38선 휴전선을 넘은 기구한 사연들을 안고 살아가기에 이들의 삶은 특별하다.
탈북 이전 북한에서 살 때보다 풍요로운 생활을 꾸리는가 하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중병을 앓는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
광주시는 22일 “2009년부터 집계한 탈북자(북한이탈주민) 숫자가 10월말 기준 600명에 달했다”고 밝혔다. 광주지역 탈북자는 2009년 첫해 429명에서 2010년 514명으로 500명을 처음 넘어선데 이어 2011년 561명, 2012년 569명, 2013년 575명, 2014년 576명으로 해마다 늘었다. 지난해 573명으로 주춤하더니 올 들어 다시 증가추세로 돌아서 현재 600명(남 143명 여 457명)을 기록하고 있다.
정부가 공식 집계한 전국 2만7607명의 탈북자 중 2.2%에 달한다. 지자체별 탈북자는 서울이 6911명으로 가장 많고 경기 8185명, 인천 2587명, 충남 1226명 등의 순이다.
시는 탈북자들의 안정적 남한 정착을 돕기 위해 2007년 11월부터 ‘광주광역시 북한이탈주민지원 지역협의회’를 구성해 가동 중이다. 광주시와 시교육청,광주경찰청, 광주고용지원센터, 대한적십자사 광주지사. 민주평통자문회의, 광주하나센터 등이 참여한 이 협의회는 정부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체계적으로 기관·단체별로 도움을 주고 있다. 시의회와 자유총연맹, 북한이주민지원센터, 이북5도민 사무소, 북한이탈주민법률지원단, 새터민건강복지센터, 사단법인 솔잎쉼터 등도 힘을 보탠다.
지역적응센터, 맞춤형 사회문화·교육 방식의 ‘무지개 학교’, 새터민 무료 직업소개소의 운영과 사랑의 김장나누기, 탈북자 멘토-멘티 활동, 어울림 한마당 행사 개최 등이다.
다양한 초기적응·취업 교육과 자활프로그램이 각 기관·단체의 협조 속에서 운영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탈북자들의 남한 생활이 누구나 예외없이 풍족하고 안정적인 것은 아니다.
광주시 북한이탈주민지원 지역협의회가 최근 발표한 ‘광주지역 거주 탈북자 지원현황’에 따르면 광주 거주 탈북자 3명 중 1명은 영세민 지원을 받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전체 600명 중 201명인 33.5%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의료비를 지원받는 의료급여 지원 대상도 263명으로 43.8%에 달했다.
광주지역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나 의료급여 대상자가 7만1600여명과 7만700여명으로 4.8∼4.9% 비율에 불과한 것과 대비된다.
취업전선에 직접 뛰어든 탈북자 비율은 많아야 10~20%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추산된다. 의사와 공무원 등 안정적 직종도 이따금 있지만 제조업체 생산라인과 식당 등에서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 일당 형식으로 취업하는 게 대부분이다.
광주전남북한이주민지원센터는 올해의 경우 42명이 취업했으나 의료보험과 산재보험 등 소위 4대 보험이 보장되는 정규직은 15% 정도 된다고 설명했다.
눈여겨 볼만한 것은 광주시가 2013년부터 매년 탈북자만을 대상으로 한 ‘경력경쟁임용시험’을 실시해 그동안 4명의 지방공무원을 선발했다는 점이다. 사회·행정학개론 등의 공개시험을 통과해 행정직 9급 공무원으로 임용된 이들은 광주 북구에 2명, 광산구와 서구에 1명씩 4명이 배치돼 있다. 이들은 국내 대학생들도 낙타가 바늘구멍 뚫기 만큼 힘든 공무원 신분을 부여받고 자치구 실·과에서 당당히 근무 중이다. 반면 이들과 달리 힘겹게 연명하는 탈북자도 꽤 많다. 600명의 광주지역 탈북자 가운데 상당수는 막노동이나 식당 주방일 등으로 생계를 겨우 잇고 있다.
광주 북구 이한민 민간협력계장은 "비공식 인원을 포함하면 국내 탈북자가 이미 3만 명을 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며 “일부 탈북자들은 이웃들로부터 다문화 가정보다 더한 차별을 받고 편견과 곱지 않은 시선을 감수해야 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
국내 탈북자 삶의 명암 엇갈려…의사 공무원부터 간암 말기환자까지.
입력 2016-11-22 15:11 수정 2016-11-22 1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