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 떨어진 아침, 계엄군에 개처럼 맞았던 고3

입력 2016-11-18 11:24 수정 2016-11-18 12:57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아침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가방에 넣고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 정문 앞을 지나고 있었다. 학교 도서관으로 가던 길이었다.
그 시각이 아침 7시쯤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청명한 5월 아침이었으나 정작 마을 분위기는 무겁기 짝이 없었다. 아주머니 몇몇이 길거리에서 수군수군 대고 있었다.
무기력한 조선인 삽화. 한반도가 러일전쟁터로 변한 일제강점기. 독재와 싸우지 않는 민족은 노예의 삶을 살게 된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성균관대 정문 앞을 지나고 있었다. 수군대던 아주머니들이 성대 정문만 바라보는 것이 이상해 나도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완전 무장한 군인과 장갑차가 학교를 봉쇄한 상태였다. 무서웠다.

그 순간, 내 정신이 아득하고 몽롱해졌다. 내 몸이 휙 날라가는 듯한 느낌만 있었을 뿐이다. 뭔가로 머리를 맞은 듯 했다. 기절 상태에 가까웠던 것 같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드럼통으로 만든 방화수에 누군가 내 머리를 쳐박고 있었다. 내 뒷덜미를 잡고 방화수에 담갔다 빼곤 했다. 성균관대 정문 수위실 뒤였다. 물을 삼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어디지 여기가? 지옥인가.

머리가 들렸을 때 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짧은 장면이었다. 맞은 편 방화수에 한 여대생이 나처럼 방화수에 머리를 박고 한 군인에 의해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그 군인은 제압봉으로 여대생을 후려치고 있었다. 여대생의 젖은 긴 머리카락이 머리를 덮었고 피가 머리카락을 적셨다. 그때서야 나도 내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참을 방화수 고문을 당하고 곤봉에 두들겨 맞았다. 억센 계엄군의 완력에 패대기 쳐지는 개구리 신세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가까스로 지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성균관대 정문 앞에 모여 있던 몇몇의 동네 주민 아주머니들이 그 군인들을 붙잡고 “이 학생은 우리 주민입니다”하고 통사정을 한 끝에 풀려난 것이다.

1979년 10.26으로 박정희가 김재규 총탄에 죽고,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전두환 세력이 바로 전날인 5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했던 것이다.

이 계엄령이 떨어지자 전국의 모든 대학을 비롯한 사회 시스템이 군에 의해 장악됐다. 그날 성균관대도 장악됐다. 그리고 군인들은 청년, 학생들이 눈에 띄면 바로 낚아채 나같이 개 취급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계엄령 포고 소식이 제 1당 대표에 의해 들리고 있다. 36년 만에 대한민국 역사가 후퇴와 몰락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고3 학생이 겪었던 충격적 상처는 밴드 붙이면 치유될 일이었지만 그때 계엄군에 의해 죽고, 끌려가고, 병신이 된 수많은 원혼들은 어쩔 것인가.

한 독재자로 시작된 비극이 아직도 계속 되는 이 현실을 어떡해야 할까. 

 어느 해 인도에서 만난 한인 선교사 한 분이 질문에 의미 있는 얘기를 했다. 평생 그곳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한 분이었다.

 “인도 사람들은 왜 이렇게 무기력 할까요. 영국으로부터 해방이 됐는데도 노예의 삶을 살고 있어요.”
 “피 흘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희생해서 싸우지 않아요. 영국 식민지 정책 때문에 굴종에 익숙해 있어요. 인도와 같았던 대한민국이 제대로 설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피 흘려 싸웠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해선 피를 흘려야 합니다.”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