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저한테 ‘다시 눈을 뜨면 뭐가 제일 먼저 보고 싶냐’고 물어보세요. (물론) 딸이 얼마만큼 컸는지, 얼마나 예뻐졌는지 보고 싶죠. 다들 그런 대답을 기대하고 하신 질문일 거예요. 근데 전 정말 야동이 보고 싶거든요. 하하.”
이동우(본명 김동우·46)는 변함없이 유쾌했다. 혹여나 분위기가 가라앉을 새라 불쑥불쑥 농담을 곁들였다. “뼛속 깊이 딴따라”라더니 과연 그렇다. 빽빽한 스케줄에 고단하지 않으냐 물으니 “인터뷰가 체질”이라며 호탕하게 웃는 그다.
개그맨으로, 가수로, 라디오DJ로 활발히 활동하던 이동우는 2010년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을 잃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불행에 절망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섰다. 꾸준히 라디오 진행을 했고, 두 장의 재즈 앨범도 냈다. 이번에는 스크린 도전. 영화 ‘시소’의 주인공이 된 그를 최근 서울 강남구 SM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만났다.
“지금도 계속 설레어요. 연애할 때의 설렘과 비슷해요. 기분 좋은 긴장이죠. 영화 주연이라는 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잖아요. 제 삶에 보너스 선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에요.”
‘시소’는 이동우와 그의 친구 임재신(44)씨가 함께한 열흘간의 제주도 여행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임씨는 근육병의 일종인 진행성 근이양증을 앓아 온몸이 마비됐다. 눈이 보이지 않는 남자와 눈만 보이는 남자. 두 사람은 고희영 감독의 촬영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서로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사실 이들의 이야기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둘은 6년 전 처음 만났다. 이동우 가족이 출연한 MBC 휴먼다큐멘터리 ‘사랑’(2010)을 본 임씨가 안구 기증 의사를 전했다. ‘단 5분만이라도 딸 얼굴을 보고 싶다’는 이동우의 말이 임씨의 마음을 흔든 것이다.
의학적으로 망막 이식은 불가능하다. 이동우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술이 가능하다해도 당연히 받을 수 없었다. 임씨의 결정이 그저 놀랍고 고마웠다. 그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얻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처음 영화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어땠나.
“굉장히 매력적인 제안이었어요. 장애인에게 여행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거거든요.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저희도 분명 여행에 대한 동경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여행 콘셉트로 촬영을 한다니 ‘이게 웬 떡이냐’ 싶었죠. 말이 촬영이지, 저와 재신이에게는 그저 여행이었던 거죠.”
-이번 여행을 통해 제일 하고 싶었던 게 있다면.
“재신이를 좀 더 많이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쉴 새 없이 얘기를 나눴죠.”
-그렇게 해서 더 알게 된 건?
“그동안 재신이를 보며 느꼈던 것들이 한층 더 견고해졌어요. ‘아, 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구나. 정말 멋있는 사람이구나.’ 임재신은 내 삶을 변화시켜주고 지탱해주는 ‘인생의 책 한 권’ 같은 존재예요.”
-재신씨와 처음 만나 어떤 과정을 거쳐 가까워졌나.
“사실 여러모로 가까워지기 어려웠죠. 현실적으로 친구가 되기 힘든 부분이 있었어요. 일단 집이 멀어요. 둘 다 중증장애가 있어 움직이는 데 한계가 있으니 자주 볼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한 게 문자질이에요(웃음). 고마운 마음이 컸지만 한편으로 조심스럽기도 했어요. 눈을 주겠다는 제안이 고맙고 놀라우면서도 상당한 부담이 됐죠. 또 제가 그 얘기를 여러 매체를 통해 공개하면서 재신이에게 예상치 못한 여파가 있었고요. 서로 약간 조심스럽거나 쑥스러운 기분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재신씨 덕분에 ‘세상을 보는 눈’을 얻었다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나.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은 다 껍데기에요. 그 껍데기를 뚫고 본질에 다가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사람에게는 그런 초능력이 없죠. 저 또한 정상인의 눈으로 살 때는 늘 껍데기만 보며 허덕였던 것 같아요. 겉모습에 현혹된 거죠. 그게 퇴색되거나 변질되면 우리 마음은 변하잖아요. 거기서 오는 괴로움이나 고통들이 있고요. 내가 말하는 ‘세상을 보는 눈’이라는 건 예전에 볼 수 없던, 껍데기 안에 들어있는 본질을 본다는 거예요. 그게 재신이가 제게 준 눈이에요. 굉장히 영광스럽고 행복한 거죠. 어마어마한 선물이에요. 남들에게 없는 눈이 저한테 있는 거니까.”
-‘시소’에서는 재신씨와의 여행 이야기 뿐 아니라 가족과의 일상도 그려진다. 딸 지우양이 참 예쁘던데.
“하하. 그렇죠. 딸들은 다 예뻐요.”
-딸에게 평소 중요하게 해주는 이야기가 있다면.
“넌 소중한 사람이라고. ‘네가 어디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생각을 하든 넌 굉장히 소중한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해줘요. 제가 그런 얘기를 못 듣고 자랐거든요. 어릴 때부터 나중에 커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그런 얘기를 많이 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었어요.”
-비교적 평범한 일상을 보내더라. 딸 학교도 데려다주고 가끔 가족여행도 가고.
“일상이야 뭐 크게 다를 게 있겠어요? 다만 너무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딸이랑 익스트림 스포츠를 하러가고 싶어요. 제가 워낙 활동적인 편이었거든요. 지금은 익스트림은커녕 혼자 걷는 것조차 못하고 있으니 답답함이 크죠. 만약 시력을 회복한다면 일상이 확 달라질 거예요. 아마 아내는 딸하고 저 보기 힘들어질 걸요? 늘 어딘가로 떠나있을 테니까(웃음).”
-정말 갑작스럽게 결핍이라는 걸 얻게 됐다. 절망감이 매우 컸을 텐데, 어떻게 극복을 했는지.
“음, 그 얘기가 참 중요한데요. 저는 사실 극복한 사람이 아니에요. 극복은 과학자들이 하는 거죠. 저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예전에는 원망하고 분노하고 좌절했다면 지금은 좀 더 겸허해졌다는 차이가 있죠. 저는 이 병을 극복할 수 없어요. 이건 굉장히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문제예요. 근데 사람들은 왜 내가 극복했다고 생각할까. 그건 아마 제가 웃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왜 웃을 수 있냐고요? 받아들였기 때문이에요.”
-받아들이기까지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하하하. 그렇죠. 하지만 어떡해요. 제가 항상 강조하는 게 시간의 힘이에요. 시간이라는 건 절대적으로 불행만 주진 않아요. 어떤 식으로든 분명한 변화가 있죠. 그걸 믿게 됐어요.”
-활동을 재개할 때에도 큰 결심이 필요했을 텐데.
“저는 그냥 뼛속 깊이 딴따라라서요. 다른 건 생각해본 적도 없고 능력도 없어요. 딴따라들은 못 말려요. ‘까짓 거 하면 되지 뭘 못해’ 그런 마음이죠. 노래하는데 (앞을) 보고 못 보고가 뭐 중요해요. 내 목소리가 나오고 내 감성이 살아있는데. 그럼 가능한 거거든요. 다 할 수 있어요.”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저는 계획도 목표도 없어요. 삶이라는 게 계획이나 목표대로 안 되거든요. 계속 걸어갈 뿐이죠. (사는 건) 어차피 여행이에요.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르죠. 다만 심장이 멈출 때까지는 계속 걸어갈 거예요. 그 방향이 틀리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