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1월 23일 오전, 전두환 전 대통령은 TV생중계를 통해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란 제목의 사과문을 낭독했다. 일해재단 비리 등 이른바 ‘5공 비리’의 실상을 추궁하는 비난 여론이 비등했던 때였다.
전 전 대통령은 일해재단에 대해 “당초 설립 취지대로 ‘아웅산 사건’ 유가족을 돕는 일에 그쳐야 했다고 후회하고 있다”며 “현직 대통령이 이 사업에 관심을 보이면서 기금 모금·관리에 잘못이 빚어진 점은 모두 저의 불찰”이라고 해명했다. ‘일해재단 비리’는 83년 발생한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 유가족을 위한 장학재단을 설립하겠다며 84~87년 재벌기업으로부터 기부금 명목으로 598억여원을 뜯어낸 사건이다. 전 전 대통령은 사과문 발표 직후 백담사로 은둔했다.
‘일해’로 보는 ‘미르·K스포츠’
지금 대한민국을 달구는 ‘미르·K스포츠재단’ 사건을 보면서 ‘기시감(데자뷰)’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20년 전 일해재단 사건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기금 출연 과정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강제성 있는 모금이 이뤄졌다는 폭로가 나오며, 특정 인사를 재단 이사장에 앉혀 운영을 도맡게 하는 등 사실상 재단이 사유물로 전락했다는 점 등에서 일해재단 사건과 ‘판박이’라는 것이다. 일부에선 안종범(60·구속)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을 당시 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일해재단 ‘총 연출자’인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에 비유하기도 한다.
‘최순실 국정농단’의 출발선이자 두 가지 핵심 가운데 하나인 미르·K스포츠재단 수사는 어떤 결말이 날까. 비슷한 사건구조를 갖고 있는 일해재단의 경우 사법 처리된 사람은 2명에 그쳤다.
검찰 특별수사본부격인 ‘5공비리 특별수사부’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소환해 일해재단 모금 과정에서 일부 강제성이 있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정 명예회장은 “84년 1차 모금 때는 주도적 역할을 했다”면서도 “85년 2차, 86년 3차 모금 때는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일해재단 측 요청에 따라 순순히 응하는 게 편할 거 같아 냈다”고 했다.
하지만 검찰은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과 김인배 전 일해재단 사무처장만 재판에 넘겼다. 검찰은 장 전 실장에 직권남용, 대통령경호실법 위반을 적용했다. 1989년 1심 재판부는 장 전 실장에게 징역 10개월과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 그는 수감 4개월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장기간 항소심 재판을 받다 1993년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았다.
일해재단 기금 15억원을 빼돌려 이자수익 9000만원을 가로챈 혐의(횡령)로 기소된 김 전 사무처장도 1심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기업 처벌 쉽지 않을 듯
장 전 실장은 당시 검찰 조사를 받으며 되레 큰소리를 쳤다. 그는 “일부 기탁자들이 할당된 돈보다 더 많이 내거나, 낼 거라고 생각도 못했던 사람이 스스로 찾아와 돈을 냈다”며 “이것도 전부 내 탓이냐”며 언성을 높였다.
일해재단에 출연한 재벌들이 모금 계획(300억원)보다 훨씬 많은 돈을 내는 과정에서 재단 설립자가 현직 대통령인 점이 작용했는지, 출연한 기업에 특혜가 주어졌는지 여부 등을 밝혀내지 못했다. 국세청이 일해재단에 기부금을 낸 기업들에게 “손비(損費)로 처리해 세금을 탈루했다”며 세금 32억원을 추징한 게 전부였다.
당시 검찰이 발표한 수사결과는 초라했다. ‘일해재단 기금 목표액은 300억원이었으나 총 598억5000만원이 모금됐음. 이는 현직 대통령이 재단을 설립한 사실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나, 전 전 대통령이나 장 전 실장 등은 기금 출연을 강요한 사실이 없으며 출연한 기업에 특혜를 줬는지 여부도 밝혀지지 않았음. 재단 기금이 유용된 사실은 없으나, 동국제강 측이 기부한 42억5000만원 중 26억원 행방은 밝혀지지 않았음. 주식에 투자됐다는 설은 낭설임.’
이 때문에 법조계 안팎에선 미르·K스포츠재단 수사가 일해재단 수사의 ‘닮은꼴’이 될 것으로 본다.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 기금 모금 등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개입했는지, 기금을 낸 대기업들에 특혜를 대가로 줬는지를 밝혀내는 게 쉽지 않다는 분석이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한국 달라진 게 없다… 28년전 5공 일해재단 비리와 판박이
입력 2016-11-08 0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