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숙하다는 핑계로 배제되는 청소년들이지만, 우리 스스로는 그것이 그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억압과 핍박 하에서도 우리는 시민입니다. 우리는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수능이 일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 한 고등학교에 붙은 고3 수험생의 대자보가 잔잔한 감동을 전하고 있다.
3일 SNS와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이화여고에 붙은 두 장의 대자보 사진이 빠르게 확산됐다. ‘이화인의 오늘을 묻습니다. 오늘, 당신은 시민인가요’라는 제목으로 작성된 대자보 끝에는 3학년 재학생 두 명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두 학생은 대통령 ‘비선실세’로 지목된 최순실 사태가 민주주의의 역행을 의미한다고 지적하며 “대선투표를 할 수 없었던 청소년들에게도 이 일은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최순실씨와 그 일행은 차례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지만, 이는 형벌이나, 녹화된 대국민 사과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고 주장했다.
학생들은 이어 “입시란 큰 과제 앞에 선 우리에게 이러한 비선 실세니, 권력형 비리니 하는 것들은 다른 세계의 일인 것 같기도 하다”며 “그러나 잊으시면 안 되는 것이 있다. 바로 우리는 시민이라는 사실이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나라가 원하는 대로 자라왔지만 ‘갇혀있다고 해서 권리가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스스로 행동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도 했다. 더럽고 추악한 정치를 외면하지 말고, ‘우리가 살아가야 할 국가’를 마주하라고 주장했다.
대자보 말미에는 헌법 1조 1항과 2항이 적혀있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학생들은 “우리 모두는 국민이고 주인이다. 당신의 작은 관심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고 덧붙였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비판하는 움직임은 10대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 지난 1일 전북 김제 지역 중학생 10여명이 시민들과 함께 집회를 열어 시가행진을 했고 지난 2일에는 서울 중동고등학교의 일부 학생들이 시국선언문을 냈다.
이화여고의 대자보는 최순실 사태에 분노하는 것을 넘어 같은 청소년들에게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일깨웠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커뮤니티에는 “읽는 내내 가슴이 뭉클했다” “자랑스럽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번 사태가 철저히 규명되길 바란다” 등의 댓글이 줄을 이었다.
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