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렉터들은 특별나다. 미술이 TV, 영화, 가요 같은 대중문화처럼 쉽게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같은 르네상스의 거장, 고흐, 마네 같은 인상파 화가, 정선, 김홍도, 신윤복 같은 조선시대 화가 등 우리에게 익숙한 화가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배워 아는, 상식 수준 이외의 현대미술 작품을 즐겨 감상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베토벤의 ‘운명’을 안다고 해서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서양미술사, 한국미술사 같은 기초적인 교양조차 중 ·고교 시절에 배우지 않는다. 대학시절에 교양과목으로라도 따로 배우지 않았다면 현대미술 감상은 생각보다 어렵다. 관람료가 없거나, 유료라고 해봤자 영화 티켓 값 정도인데도 불구하고, 미술 작품 관람을 내켜하지 않는 것은 그 만큼 감상 지식이 부족하고, 감상 문화에 노출될 기회가 많지 않아서일 것이다.미술 담당 기자라 어쩌다 전시회 티켓을 얻어 주면, “저는 미술엔 문외한입니다”라며 대놓고 손사래 치는 남자 후배도 있었다.
보는 것도 내키지 않는 판에 하물며 미술품 구입이라니. 그것도 백 만 원이상은 써야 뭔가 작품다운 작품을 살 수 있다니, 컬렉터에겐 정말 특별한 뭔가가 있을 것 같지 않은가. 무엇이 그들을 컬렉터의 길로 이끌었는지 미술기자를 하면서 알게 된 주변의 컬렉터들에게 물어봤다.
#컬렉터가 된 동기, 유형별로 분석해봤더니
그 유형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을 해봤다.
우선 학창시절 화가나 큐레이터가 되려고 미대 혹은 미학과에 진학하려고 했던 꿈이 현실적 이유로 좌절된 아픔이 결국 세월이 흐른 후 그림 소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 또 고교 시절 학교 가는 길에 반드시 인사동을 거쳐 가다보니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되거나,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그 집에 걸린 서화, 미술작품을 봤을 때의 감동 등 미술에 노출된 경험이 컬력션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다못해 남성들의 세계에서는 고교 동문의 개인전에 갔다가 인사치레로 사준 것이 상상도 못했던 컬렉터의 길로 이끌기도 했다.
컬렉터 시절 소장품만 100억원어치가 넘었던 대구의 큰 손 컬렉터 출신의 안혜령 리안갤러리 대표. 그는 미대를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수학과에 진학했다. 결혼 후 다시 미대에 진학하려는데 사업가인 남편이 차라리 그림을 구매하라고 한 것이 컬렉터로서의 첫 발을 딛게 된 계기였다.
삼성그룹 계열사에서 임원으로 있다가 퇴직하고 지금은 금융업종에서 상무로 일하는 C모씨. 고교 때 꿈이 미술평론가였으나 공대에 진학할 수 밖에 없었다는 그는 서울 광화문 인근의 이전 회사에 다닐 때 점심시간을 이용해 가까운 인사동, 삼청동을 돌며 전시를 구경했다. 그림을 사면서 그는 못 이룬 꿈에 대한 회한을 달랠 수 있었다.
경기도 용인시 이영미술관 김이환 관장은 강렬한 원색의 채색화로 동양화의 새 장을 개척한 한국화가 박생광(1904-1985), 오방색의 ‘색채 추상화가’로 불리는 서양화가 전혁림(1916-2010) 등 두 대가의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그의 첫 컬렉션은 박생광의 작품이었다. 고위 공무원이었던 시절, 진주농고 선배인 박생광의 전시회에 갔다가 동문의 의리로 사준 것이 평생의 후원자가 됐다. 엷은 수묵화가 대세이던 시절에 박생광 작가가 기존의 일본화풍을 버리고, 전통적인 원색의 석채 안료를 써서 역사, 설화, 불교, 샤머니즘 등을 주제로 독자적인 현대적 한국화를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김 관장의 후원의 힘이 컸다.
사업가이자, 컬렉터, 작가로 불리는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 그는 올해 세계적인 미술전문매체 아트넷이 선정한 세계 톱 100 컬렉터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아트넷이 뽑은 세계 100대 컬렉터 명단에는 러시아 석유 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 헤지펀드 거물 스티브 코헨, 배우이자 컬렉터로 활발히 활동하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맥킨지앤드컴퍼니의 시니어 파트너인 알렌 라우 등이 포함됐다.
서울과 천안, 중국 상하이에 아라리오 갤러리를 운영하는 김 회장은 2014년 서울의 ‘공간’ 사옥을 인수해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를 개관한 데 이어 제주에 옛 모텔, 복합영화관 등 버려진 건물을 개조한 4개의 미술관을 설립해 자신의 컬렉션을 전시해 보여주고 있다. 30대 중반에 시작한 그의 첫 컬렉션은 동양화였다. 고교가 인사동 근처여서 친근했고 자연스레 청전 이상범, 남농 허건의 그림을 구입하게 됐다. 그러다가 현대미술에 매료돼 컬렉션 장르가 현대미술로 갈아탄 케이스다.
은행 지점장을 하다가 퇴직한 Y모씨. 동양화에 조예가 깊은 그는 군대에 있을 때 부산에서 복무했는데, 서울의 간송미술관 전시가 있으면 밤차를 타고 와서라도 전시를 놓치지 않을 정도였다. 고등학교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친구 아버지의 서재에서 본 동양화 족자에서 받은 감동이 그를 동양화 마니아로 이끌었다.
요약하자면 그림 보는 걸 좋아하고, 결국 수집으로 까지가는 데는 특별난 계기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림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다가 나이에 따른 심경 변화가 생애 첫 컬렉션으로 이끈 경우도 있다.
50대 중반인 S선배가 그랬다. 올해 고교 동창의 개인전에 갔다가 한 점 사게 된 초보 컬렉터이지만, 그의 얘기를 들어보면 진작부터 그림을 사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고교 때 미술 선생님은 지금은 뉴욕에서 활동하는 B작가다. B작가는 시계, 바이올린 등 벼룩시장에서 수집한 앤틱을 오브제 삼아 풍자적인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위스키 병에 신윤복 미인도를 슬쩍 입히거나 오래된 불상의 머리를 떼내고 백발 서양 할아버지 머리를 얹히는 식이다.
S선배는 그 B 미술선생님과 얽힌 좋지 않은 기억이 있다. 미술 시간에는 운동장에 나가 풍경을 스케치하는 수업이 많았다. 카톨릭학교였던 터라 인상 깊은 성당 풍경을 그려 냈다.
“얌마, 이건 그림이 아니야. 유치원생 그림이야. 풍경화의 기본은 원근인데, 이 그림엔 원근이 없어.”
트라우마가 얼마나 컸던지 당시 받았던 점수가 62점이라는 걸 그 선배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했다. 이후 그 선배는 자신은 그림에는 재주도 없는 사람이라고 치부하고 아예 그림 동네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신문기자가 된 그는 1991년 취재차 폴란드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바르샤바대학 입구에서 대학생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파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고, 그 때 몇 달러를 주고 학생들이 그린 수채화 한 점을 샀다. 집안에 꽤 오래 두었던 이 그림은 이사를 다니면서 사라졌고, 그 빈 벽을 다른 그림으로 채우고 싶다는 욕망이 언제나 자리하고 있었다. 그 근저에는 중산층 자격 심리가 있음을 그는 고백했다.
“그래도 일산의 중형 아파트에 살고, 신문기자이고, 논설위원까지 하고 있는데, 집에 번듯한 그림 한 점은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10여년전부터 들었지만 선뜻 구매로 이어질만한 계기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2012년인가. 언론 보도를 통해 한국과 프랑스의 중산층 개념 차이가 아주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한국의 중산층에 대한 정의는 이렇다. 4년제 대학을 나오고, 10여년 정도 한 직장에 다니고, 월소득은 400만 원 이상 되고, 30평 이상 되는 아파트에 살며, 2000cc 이상 된 중형차를 타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 프랑스의 전 대통령 퐁피두가 말한 프랑스식 중산층 개념은 향유하는 문화가 척도가 된다.
‘중산층이라면 외국어 하나쯤 자유롭게 구사하여 폭넓은 세계 경험을 갖추고, 스포츠를 즐기거나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아야 하고, 별미 하나 정도는 만들어 손님접대를 할 줄 알며 사회 정의가 흔들릴 때 이를 바로 잡기 위해 나설 줄 알아야 한다.’
한국에서 중산층의 개념이 집의 크기, 차의 크기 등 과시적인 것이라면 프랑스의 기준은 문화적인 향유와 휴머니즘의 실천이다. S선배의 그림 구매욕구는 경제적인 기준을 충족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문화적인 욕구로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거실의 그림 한점은 어쩌면 중산층의 자격이다.
#컬렉터가 되기 위해 진짜 필요한 건 지갑을 여는 용기
막상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타나도 머뭇거리게 마련이다. 더 나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저울질 때문이다. 그런데 컬렉터들은 한결 같이 말한다. “나올 때 사라. 좀더 좋은 작품 나오면 사겠다라고 생각하지만, 절대 다시 안나온다.”
주저하다 놓친 그림을 애석해하다가 세월이 흘러 다시 시장에 나온 그 작품을 결국 샀다는 컬렉터들의 에피소드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진짜 컬렉터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용기다. 올해 전남 해남군 현산면 만안리 40여가구가 사는 작은 농촌마을에 갤러리가 생겼다. 귀농한 전병오(46) 정수연(47) 부부가 농기구 창고를 개조해 만든 ‘베짱이 농부네’ 예술창고’ 는 지난 5월 오픈했다. 해남에 기반을 둔 행촌문화재단(이사장 김동국·해남종합병원장)이 생활공간 속 예술을 기치로 내걸며 이 부부에게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됐다.
첫 전시 ‘고라니가 키우는 콩밭’전은 아내 정씨와 중견 작가 박미화(59)씨의 콜라보레이션이다. 농사를 짓는 틈틈이 시를 쓰는 정씨가 쑥스럽게 내밀었던 습작 시에서 제목을 땄다. 박 작가는 이 시를 모티브로 회화, 조각, 설치 등 20여점을 제작해 선보였다. 박 작가는 서울대 도예과 졸업 후 미국에서 회화와 조각을 공부했다. 개막일에는 마을 주민뿐 아니라 인근 목포, 완도 등지에서도 손님이 오며 200여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뤘다.
추상화처럼 난해한 게 아니라 밭에서 보는 고라니 등 내 일상 풍경이 담긴 작품에 끌렸을까. 미술관 구경 한 번 못해 본 사람이 태반인 농촌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개막일에 6점 정도를 남기고 모두 팔린 것이다. 지역민 경제 사정을 고려해 50만원 이하로 가격을 매겼더니 너도나도 생애 첫 컬렉터가 됐다. “엄마, 나 저 그림 살래. 맡겨둔 세뱃돈 12만원 주세요.” 초등 4학년 혜인이는 개막 전날에 엄마와 구경하러 왔다가 첫 손님이 됐다.
초등생 혜인이는 컬렉터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용기를 보여준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타산이 아니라 정말 좋아하는 것에 기꺼이 지갑을 열수 있는 순수한 열망과 용기, 그게 컬렉터의 첫걸음이 아닐까.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