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답사과┃네가 하면 “국기문란” 내가 하면 “순수한 마음”
마침, 대통령의 ‘녹화 사과'를 새누리당 관계자들과 보게 되었다. “하… 답이 없어… 노답이야, 노답” 정치권에 오래 몸 담았던 그는 텔레비전에서 고개를 떼지 못했다. 또 다른 새누리당 사람은 “이쯤 되면 스스로 물러나야 되는데… 내 입으로 탄핵을 말할 수도 없고…” 고개를 갸웃하다 푹 떨구었다. 사과는 95초 만에 끝났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느 때처럼 질문도 받지 않고 제 할 말 했으니 됐다는 태도로 황망히 모습을 감추었다.
믹스커피가 차분히 식어가는 동안 사무실 곳곳에서 한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박 대통령은 2년 전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 당시 “문건 유출은 국기문란 행위”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고 변명했다. 가짜 무당이 전직 호스트바 선수와 함께 국가 기밀을 보며 나라의 운명을 좌우했다는 의혹이 신문과 뉴스를 장식했다. 칼 마르크스의 말 대로 역사는 반복됐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박정희의 비극은 박근혜의 희극으로 되풀이됐다.
짤방메이커│박그네는 ‘표정'으로 웃긴다
희극에 대해서라면 개그맨이 이 나라 최고의 전문가다. 백수 시절, 하릴없이 쿵쾅대는 지하철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세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를 보곤 했다. 개그맨 정성호 씨가 박 대통령을 흉내 낸 ‘박그네’를 연기할 때면 히죽히죽 웃어댔다. 신기하게도 박그네는 아무런 말없이 앉아있기만 했는데도 우스웠다.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명박과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사한 캐릭터는 특유의 말투를 과장해 익살스러운 콩트를 해야만 사람들을 웃길 수 있었다. 그러나 박그네는 고개만 갸웃거려도 사람들이 깔깔거렸다. 그 비법이 궁금해 정성호 씨의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그는 2012년 레이디경향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 모사의 핵심으로 ‘표정’을 꼽았다.
꼭두각시│응고된 표정으로 만드는 웃긴 짤방의 미학
박 대통령이 익살스러운 소극(笑劇)의 주인공으로 인터넷 짤방(게시물 ‘잘림 방지’를 위해 넣는 우스운 사진) 지분율 상위에 랭크된 이유는 바로 표정 때문이었다. 앙리 베르그송은 “(웃긴 얼굴이란) 얼굴의 일상적 유연성 속에서 어떤 굳어진 것, 응고된 것을 연상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안철수 의원의 아내 김미경 교수를 노려보는 찌릿한 눈빛이나 넋을 빼놓고 멍하게 앉아있는 모습, 기묘한 표정으로 두 손을 들어 올려 국회를 성토하는 장면 모두 응고된 단단한 얼굴이 압권이었다. 전여옥 전 의원이 말한대로 박 대통령에게는 사람을 향한 따뜻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유능했더라면 인간적 느낌이 결여된 차가움조차 카리스마로 해석됐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무능했다. 차가움은 면피를 갈구하는 당혹스러운 몸짓으로 읽혔다. 대중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마술은 끝났다. 트릭이 드러나면 처음에는 경악스럽지만 곧 헛헛한 웃음과 “에이… 별 거 아니네”하는 반응이 나온다. 귀여운 텔레토비가 알고 보니 탈을 쓴 중년 아저씨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마음이 착잡했던가. 꼭두각시 연극이 끝나고 무대 뒤에서 인형 줄을 조종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면 일순간 신비로움이 사라진다.
이제 박 대통령의 응고된 얼굴은 더 이상 웃기지 않는다. 그 기계 같은 표정 뒤에 최순실이라는 사이비교주의 딸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금이야 충격적이고 마음이 어지럽겠지만 곧 모든 먼지가 가라앉고 나면 담백한 진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마술 공연 티켓을 끊을 때, 꼭두각시 연극에 아이들을 데려갈 때, 텔레토비를 보려 채널을 돌렸을 때 당신은 몰랐는가. 마술은 트릭이고 꼭두각시는 기교이며 텔레토비는 탈을 쓴 인간이라는 점을 진정 몰랐는가. 박근혜 대통령을 뽑을 때 뒤에 최태민의 그림자가 있고 사사로움이 국정을 좌우하던 유신시대가 있다는 점을 정말로 알지 못했을까. 당신은 대통령에게 속은 걸까 자기 자신에게 속은 걸까.
고승혁 기자 marquez@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