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폴(35·본명 엄성진)씨는 에스프레소가 담긴 잔에 뜨거운 우유를 천천히 부었다. 끝이 뾰족한 송곳으로 에스프레소와 우유가 닿은 면에 그림을 그려 넣으니 동화 ‘피터팬’에 나오는 팅커벨이 생겼다. 지난 4월 중국 상해에서 열린 라테아트세계대회에서 우승할 때 선보였던 작품이다. 송곳엔 ‘Jesus Christ(예수 그리스도)’라고 적혀 있었다. 최근 서울 성북구 보문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엄폴씨가 말했다.
“라테아트를 하면서 예수님을 잊지 않으려고 대회 직전에 적어 넣었어요.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건 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에요.”
바울처럼
라테아트란 뜨거운 우유를 이용해 커피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이다. 2005년 1월 들른 한 커피숍에서 우연히 라테아트라는 걸 알게 된 뒤 수없이 반복하며 연습했다. 1년쯤 지나 대구 삼덕동 뒷골목에 4평짜리 작은 커피숍을 차렸다.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몰렸다. 욕심이 생겨 가게를 40평 공간으로 확장했고 위치도 유동인구가 많은 대로변으로 옮겼다. 커피숍 간판도 자신의 성(姓)으로 바꿨다. 엄스커피.
그런데 거짓말처럼 갑자기 손님이 급감했다. 허탈감에 빠져 텅 빈 가게를 혼자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장에 꽂힌 성경책을 펼쳤다. 사울이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결심하고 바울로 개명하는 내용에서 눈길이 멈췄다. ‘앞으로는 나도 내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겠다.’ 이렇게 결단한 뒤 그도 엄성진에서 엄폴로 이름을 바꿨다. 폴(Paul)은 바울의 영어 이름이다.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워지면서 가게를 부동산에 내놓았지만 관심을 보이는 세입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도와달라고 기도했지만 구체적인 응답은 없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는 음성만 들리는 것 같았다. 몇 달 뒤 엄폴씨는 부산 수영로교회(이규현 목사)에서 예배를 드리다 이 역시 하나님의 계획이란 걸 깨달았다. 당시 이규현 목사는 이렇게 설교했다.
“광야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렇게 해주시지 않습니다. 마음이 무너져 있으면 다시 광야로 돌아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먼저 당신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실 겁니다.”
대구, 부산, 경기도 안양, 다시 대구를 거쳐 서울로 옮겨 다니며 커피 관련 일을 했지만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가 없었다. ‘바리스타를 그만둘까’하는 생각도 했다. 엄폴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광야의 시간’이라고 했다. 이때 가슴을 때린 게 빌립보서 말씀이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날개 있는 천사
매년 10월에 라테아트 국가대표 선발전이 열리는데 여기서 우승하면 세계대회 출전자격이 주어진다. 엄폴씨는 2010년에 처음으로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했다. 경연 시작 전에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 들어가 기도했다. “하나님, 라테아트를 전 세계에 선보이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탈락. 그 후로도 4번을 더 떨어진 뒤 6번째 도전 끝에 지난해 우승컵을 차지했다. 6개월 뒤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세계대회. 세계 각국의 바리스타 40여명이 모여 라테아트 실력을 겨뤘다. 10분 동안 3가지 그림을 각각 2개씩 만들어야 하는데 엄폴씨는 팅커벨과 백조, 그리고 천사를 그렸다. 모두 날개가 있는 것들이다.
그는 대회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아이 빌리브 아이 캔 플라이(I believe I can fly)’라는 노래를 부르며 작품을 선보였다. 엄폴씨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봤을 때는 ‘미운 오리 새끼’같을 수 있지만 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엄폴씨는 한국인 최초로 라테아트 세계대회에서 우승했다. 우승자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5년 전 화장실에서 했던 기도가 떠올랐다고 했다.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커피콩으로도 맛있는 커피를 만들 수 있어요. 하나님은 낮은 자를 사용하시기 때문에 지금 어렵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길 수 있어요. 제가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니까요.”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