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배우가 아니면 누가 이 배역을 소화할 수 있었을까. 흔히 하는 얘기다. 그런데 영화 ‘걷기왕’(감독 백승화)에서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심은경(22)이 선택했고, 그 결정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12일 서울 성동구 CGV왕십리에서 열린 언론 시사회를 통해 첫 선을 보인 ‘걷기왕’은 귀엽고 발랄하고 경쾌했다. 영화를 보는 92분 동안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즐거웠다. 그리고는 서서히 뭉클함이 몰려왔다. 그 따스함은 꽤 오랫동안 지속됐다.
이 영화의 주인공 ‘걷기왕’은 여고생 만복(심은경)이다. 선천적 멀미증후군을 앓아 어릴 때부터 차만 타면 구역질을 했다. 고등학생이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매일매일 걸어서 2시간이나 걸리는 학교에 통학해야 한다. 공부에 소질이 없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지만 걷는 것 하나는 누구보다 자신 있다.
담임선생님(김새벽)의 추천으로 육상부에 들어가 경보를 시작하게 됐다. 경보가 뭔지도 몰랐고 별 애정도 없었다. 하지만 점점 욕심이 커졌다. 꿈을 향한 열정과 간절함? 그런 거창한 말은 잘 모르겠다. 그저 처음으로 목숨 걸고 해내고 싶은 일이 생겼다.
남들에게 뒤쳐질까봐 불안했던 만복이는 ‘빨리 빨리’ 앞만 보고 달렸다. 발가락이 짓물러도 괜찮았다. 이뤄야 할 목표가 있으니까.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조금 느려도 괜찮지 않을까.
이 메시지가 심은경의 마음을 움직였다. 시사회 이후 진행된 간담회에서 심은경은 “엔딩 부분 때문에 이 영화 출연을 결정했다”면서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감동을 받았다. 최근 나도 ‘그래, 이렇게 빨리 갈 필요가 없는데’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만복이를 보며 자신의 학창시절을 떠올리기도 했다. 심은경은 “어릴 때부터 연기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저도 다른 친구들과 다름없이 꿈과 미래에 대해 고민했다”며 “지금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한동안 제 미래와 커리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어요. 치열하게,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자신에게 여유가 없었어요. ‘걷기왕’ 촬영하면서 많이 힐링된 것 같아요. (이제부터라도) 제가 진정 좋아하는 걸 찾고, 만복이처럼 마음껏 즐기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역 때부터 스타였던 심은경은 충무로 최연소 흥행 퀸이 됐다. ‘써니’(2011) ‘수상한 그녀’(2014) 등을 성공시키며 20대 대표 여배우로 자리 잡았다. ‘걷기왕’은 그가 출연한 첫 독립영화다. 이만한 위치에 있는 배우가 다양성 영화에 출연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그만큼 용기 있고 과감한 결정이었다.
심은경은 “개인적으로 다양성 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며 “이런 영화가 더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영화 장르도 더 다양해지기를 소망한다”고 전했다. 그리고 진심이 묻어나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 분들이 많은 힐링을 얻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