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MB가 나았어.”
지난달 만난 한 정부 고위공무원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짧게 말했다. 진보·보수 진영이 총집결했던 지난 대선에서 드라마틱하게 승리했던 박근혜정부는 기대와 달리 조기 레임덕 위기에 직면했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 등 불운했으나, 무능했던 실정(失政)이 거듭됐다.
최근 만난(또는 전해들은) 역대 정부 관료와 오피니언 리더들은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회의감을 드러냈다. 지난 총선은 이런 의견이 대규모로 표출된 첫 시그널이다. ‘어떻게든 사회를 바꿔야한다’는 공감대의 확산은 아이러니하게 현 정부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이 될 운명처럼 보인다.
문재인의 조기 진격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런 흐름 속에서 지난 6일 매머드 싱크탱크인 ‘정책공간 국민성장’을 출범시켰다. 교수 500여명으로 구성됐고, 1000명 이상으로 키울 이 조직은 앞으로 문 전 대표의 정책 구상을 담당한다.
다른 야권 주자의 심기가 편할 리 없다. 가뜩이나 8·27 전당대회부터 ‘문심(文心)’, ‘대세론’ 논란이 불거졌고 대선 경선 시기 분란도 있다. 한 야권 대선주자 측은 “싱크탱크 발표 내용은 모두 ‘우라까이(베끼기란 뜻의 언론계 은어)’한 것들”이라며 “시간에 쫒기는 것 같다”고 평가절하했다. 싱크탱크 측은 “역점 분야를 설명한 것이며 연말쯤 구체적 내용을 공개할 것”이라고 했지만 참여인사의 화려한 면면과 달리 내용이 부실했다는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이런 문제를 모르지 않았을 텐데, 왜 이 시점일까. 단순한 ‘대세론 굳히기’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대세론을 경계하는 논리는 여러 가지다. ‘이회창 버전2’ ‘고건 버전2’ 같은 전례가 있고, 호남의 반문(反文) 정서를 자극할 것이란 우려도 있다. 오르는 PK(부산·경남) 지지율로 호남의 마이너스를 상쇄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유리한 판이라면 굳이 무리할 이유가 없다. 현재 야권엔 문 전 대표를 이길 만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개헌이라는 지뢰
국가 최상위법인 헌법을 개정하자는 건 국민들에게 선뜻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정세균 국회의장은 물론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도 개헌의 당위성을 말하고 있다. ‘반기문 대통령+친박(친박근혜)계 총리’라는 여당의 이원집정부제 구상은 이미 한 차례 언론을 달궜다. 지난 총선은 김종인 전 더민주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승리이기도 하다. 김 전 대표는 내각제 개헌을 주장한다. 원내 개헌의원 모임은 개헌 마지노선(200명)에 육박한 190여명이 가입했고, 곧 이를 넘을 전망이다.
대권 주자에겐 자신이 가질 ‘5년 권력’을 나눠주는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는 탐탁지 않다. 차라리 4년 중임제를 통해 중간평가를 받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특히 총선서 승리한 야권 주자라면?
여소야대 국회 두 달, 사회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사회를 바꿔야한다’는 위기감은 국정감사가 끝나는 연말, 개헌론을 무대로 불러 올릴 전망이다. 개헌파인 한 야당 중진은 “국감에서 드러나듯 정부와 새누리당은 대통령 감싸기에 급급하다. 밖으로 표출되진 않고 있지만 이를 한심하게 보는 시각이 많다. 법안·예산 정국이 시작되면 더욱 피로감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 피로감이 폭발하면 자연히 개헌 얘기가 나올 거다. 그때쯤 우리도 얘기를 꺼내겠다”고 덧붙였다.
야권 1등의 딜레마
①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했지만 새누리당의 ‘콘크리트 지지층’(122석)도 확인했다.
②쪼개진 야권이 연합하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
③하지만 안철수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는 3자 대결에 나설 것이다.
④새누리당과 김종인 전 대표는 각각, 언제든 개헌 세력화를 시도할 수 있다.
⑤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막강한 여당 카운터파트.
이런 상황을 보면 문 전 대표는 어정쩡한 야권 1위 자리에 만족할 수 없다. 당내 잠재 후보군이 문 전 대표의 지지율을 잠식하면서 반 총장과의 거리는 도무지 좁혀지지 않고 있다. 설사 반 총장을 앞서더라도 개헌 정국 판도에 따라 전세가 뒤집힐 수 있다. 비패권지대(김종인), 제3지대(안철수), 원내 개헌모임, 원외 개헌 세력이 합해지면 대선 가도를 뒤흔들 힘이 충분하다. 더민주는 ‘문재인 비관론’이 불거지면 언제든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지사, 김부겸 의원을 호출할 것이다.
이런 큰 물줄기 속에 문 전 대표는 조기에 경쟁자를 제압하지 않으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대세론이라기 보단 ‘개헌을 하지 않더라도 내가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능력과 비전을 보여줘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이다. 결국 500여명에 달하는 싱크탱크는 정치 수사(修辭)가 아닌 정책 능력을 증명하려는 노력, 대세를 ‘자임’하려는 과시다. 야권 제1주자로서 피할 수 없는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시리즈를 시작하며
국회에 근무하며 보고 듣고 고민했던 이야기를 인터넷으로 전합니다. 정치 행위는 물론 정책과 국회 현안도 제한없이 다루려 합니다. 모르는 건 물어보며 쓰겠습니다. 정치부를 떠나면 다른 탐구를 한번 해보려 합니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