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묵상] 삼만원이면 야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말인데…

입력 2016-10-06 00:01
aura of life_oil on canvas_53.0×53.0cm_2016

우리 삶은 껍질이 되고 마른 나뭇잎이 됩니다.영속적인 시간일 것 같으나 피할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은 삶의 껍질을 만들어 냅니다. 껍질은 이내 떨어질 것이고, 마른 잎은 바람을 못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겨울 숲은 바람이 실어오는 한기에도 나목으로 견디며 이듬해 봄을 맞이할 겁니다.

'시 한편이 삼만원이면/너무 박하다 싶다가도/쌀이 두말인데 생각하면/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함민복 시인이 '긍정적인 밥'을 통해 이처럼 묘사했습니다.

바람을 탓하고, 겨울을 탓하자면야 살아온 세월이 억울하겠지요. 하지만 부활의 삶을 믿으십시오. 껍질이 비료가 되어 벼를 틔우고, 그것이 또 생명 양식이 됩니다.

노년은 삭정이 되어 불구덩이에 던져지고 식으면 재가 되어 땅에 뿌려집니다. 재는 옥토를 가꿉니다. 곧 가을이 깊어 갈 겁니다. 플라타너스 가로수 잎이 지고, 은행 잎이 떨어지고, 벼가 베어질 겁니다.

허망해 하지 마십시오. 부활을 믿으십시오. 생명은 계속 됩니다.

[전시노트] 서정도 展 2016. 10월 25일 까지 23 rue du Port 63000 Clermont-Ferrand France

수용과 관조의 미, 나무 그리고 작은 생명들…

서정도의 시선과 관심을 사로잡는 오브제들은 겸손하다. 그의 그림 속에서 자주 만나는 나무도 그러하다.
나무는 그가 선 한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간다. 시간과 공간은 무한한 전진과 변화 속에서 나무라는 존재를 단련시킨다. 구름이 왔다가 머물다 떠나는가 하면 바람이 잠시 들러 이파리를 살살 흔들다가 떠난다.

때로는 세찬 비바람과 혹한 추위, 때로는 간지러운 바람의 애무…, 나무는 그렇게 수동적인 위치에 존재한다. 여기에서 침묵과 관조 그리고 수용만이 나무에게 주어진 선택이다. 침묵이 언어의 선택이라면 수용은 행위의 선택이다. 체념이 아닌 의지로 부터의 선택, 바로 그것이 서정도가 그려내는 아름다움이다. 그렇다면 체념이나 단순한 현실의 용납이 아닌 의지의 선택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작가의 그림에서 단순 명료한 그러나 수동적 현실을 능동적으로 승화시키는 겸손하지만 강건한 나무의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그림 앞에서 나는 신비하고 미스터리한 시선과 만난다. 과연 나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가? 혹 나무가 나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까?

앙드레 마샹이 폴 클레를 인용하여 말한 적이 있다.
« 숲 속에서, 여러 번에 걸쳐서 내가 아닌 숲이 나를 응시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날은 나무들이 나를 바라보고 내게 말을 하는 느낌이었다. »
폴 클레가 숲을 산책하던 중 만났던 나무의 시선, 공간과 물질을 통과하여 내 감성 속으로 서서히 침투하는 관조적 시선이 서정도의 그림 안에 살아있다.

그의 손끝에서 태어나는 대상들의 이미지는 마치 확대경을 통해서 포착된 듯 세밀하다. 그의 눈은 마치 자연을 생체적으로 해부하는 듯하다. 잔잔하고 고요하게 묘사된 정적인 외형 속에서 동적인 생물의 호흡과 수액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바로 생명의 에너지다.

관객은 그림이 발산하는 생체 에너지의 공간으로 초대되고, 보는 자가 아닌 보여주는 자로서 서게 된다. 이러한 상호작용의 역동성은 작가가 구사하는 탄탄하고 미려한 기술이 있어 가능하다. 오랫동안 숙련된 그의 손끝에서 태어나는 섬세한 표정의 대상은 관객의 두꺼운 옷을 벗기고 나신으로, 생체적 구성 성분으로서 보여지게 만든다. 관객은 나무의 나신 앞에 선 자신의 나신을 본다.

나무를 바라보는 자가 아닌 자신의 나신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나신을 바라보는 관찰자로서, 관조의 시선은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역할을 수 없이 바꾸어 가면서 우주안의 존재로서의 일치를 이루어 간다.
서정도의 나무는 그렇게 수동성을 의지로 극복하고 능동적인 힘을 얻어낸다. 현실을 직시하여 승화시키는, 강하지만 부드럽고 유연한 힘 말이다.

화가는 우주를 통찰하려 하는 대신에 우주에 의해서 통찰 되어야 한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형상으로 우주를 묘사할 줄 알아야 한다. 수니아(재불화가 시인, 작가)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