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정’ 엄태구, 쎈캐라고?… 연기만 파는 순둥남 [인터뷰]

입력 2016-10-02 13:42 수정 2016-10-02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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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흠칫. 들을수록 매력적이다. 허스키한 중저음의 보이스가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빠져드는 건 시간문제다. 깊은 눈매와 도드라진 광대는 신비로운 느낌마저 낸다. 배우 엄태구(33)를 잊기 어려운 이유, 이뿐만이 아니다.

작품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보는 이를 압도한다. 영화 ‘밀정’을 본 관객 720만명의 뇌리에 선명히 박혔을 테다.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하시모토 역을 소화한 그의 존재감은 강렬했다. 부하의 뺨을 사정없이 때리는 장면에서 특히 그랬다. 송강호(이정출 역)와의 합에서 균형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 충분히 제 몫을 했다.

스크린 속 ‘센’ 캐릭터는 실제 엄태구와 꽤나 다르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순둥순둥’함의 결정체였다. 원체 과묵한 편인데 칭찬을 들으면 말수가 더 적어진다. “인상적인 연기였다. 잘 봤다”는 말에 눈도 제대로 못 맞추는 그다. “감사합니다” 한 마디 내뱉고 쑥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떨군다.

연기경력은 벌써 11년을 넘었다. ‘기담’(2007)이 데뷔작으로 알려졌으나 사실 ‘친절한 금자씨’(2005) 단역으로도 출연했다. 여러 작품을 거치며 내공을 쌓다 친형인 엄태화 감독의 ‘잉투기’(2013)로 두각을 나타냈다. ‘차이나타운’(2014) ‘베테랑’(2015) 등 최근작에서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연기가 늘 고통스럽고 힘들고 버거웠다”는 엄태구는 ‘밀정’ 이후 마음가짐이 바뀌었다고 했다. “정말 특별했어요. 엄청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이에요. 제 직업이랑 조금 더 친해진 것 같아요. ‘이렇게 하니까 즐겁고 재미있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값진 경험이었죠.”

자신을 믿어준 김지운 감독과 끝없이 배려해준 송강호 덕분이었다. 두 사람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했다. “갑자기 제 연기가 좋아진다거나 그러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이 직업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좋은 밑거름이 된 것 같아요.”

그는 촬영 당시를 한참 회상했다. ‘밥 먹었냐’ 무심한 듯 자상한 김지운 감독의 안부인사, ‘잘했다’ 중국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송강호가 건넨 칭찬. 그들과 함께한 순간들을 추억하며 순간순간 울컥해했다. “좋은 것만 기억하네요(웃음). 근데 대부분 좋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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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을 통해 ‘밀정’에 캐스팅 됐다고.
“하시모토 역 뿐만 아니라 하일수(허성태)나 의열단원 테스트를 다 받았어요. 일반적인 오디션장과 달리 감독님과 제 의자 두 개만 딱 놓여있었죠. 김지운 감독님께 디렉션을 받는 자체가 영광스럽고 신나더라고요. 그래서 한결 편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평소 작품을 준비할 때 꼼꼼한 편이라고 들었다.
“그(작품) 생각밖에 안 해요. 원래 평소에 아무 생각 안하니까(웃음) 작품 하나 들어오면 계속 그것만 보죠. 미련할 정도로 많이 파는 편이에요.”

-‘밀정’의 하시모토는 어떻게 해석했나.
“매의 이미지가 그려졌어요. 유유히 관찰하다가 먹잇감이 발견되면 쏘아붙이는 모습이요. 임무를 해내는 게 하시모토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놓치지 않으려 했어요. 그래야 어떤 장애물이 발생했을 때 그만큼의 예민한 반응과 과한 폭력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송강호·공유·한지민·신성록 등 선배들과 호흡 맞춘 소감은.
“지금까지 연기를 해오면서 이렇게까지 배우들과 친밀하게 지낸 건 처음인 것 같아요. 다들 너무 잘 챙겨주셨어요. 그 중심에 송강호 선배님이 계셨고요. 제가 막내 역할을 못했는데 막내의 챙김은 받았어요(웃음).”

-연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필모그래피는 꽉 차 있다. 지금껏 달려온 원동력은 뭔가.
“방법이 없었어요. 잘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버틴 것 같아요. 멀리 생각하지 않고 당장 앞에 주어진 것에만 충실하려 했죠. ‘지금 최선을 다하자.’ 작품 들어갈 때마다 그 생각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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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는.
“교회 성극을 했어요. 고등학교 때 친했던 ‘얼짱’ 출신 친구랑 함께했었는데, 걔가 어느 날 ‘우리 진지하게 연기학원에 다녀보자’는 거예요. 처음에는 엄두가 안 났지만 ‘한 번 해보기나 하자’는 마음으로 들어갔죠. 19세 때였어요. 점점 연기에 빠져 대학 진학도 이쪽으로 했죠.”(*엄태구는 건국대 영화학과 출신이다.)

-연기를 해보면서 어느 정도 확신이 들었나 보다.
“확신은 없었어요. 그냥 다른 거 잘하는 게 없었던 것 같아요. ‘계속하면 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어요. 이렇게 힘든 일인지 알았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모르겠지만(웃음).”

-내성적인 성격이 약간의 걸림돌이 됐을 수 있겠다.
“그래서 적성에 참 안 맞는다는 생각을 한 시기가 있었어요. (다른 배우들을 보면서) ‘나는 왜 저렇게 편하게 못 놀지?’ 하는 답답함이 있었어요. 그런 성격이 작은 목소리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인터뷰하면서 이 얘기 처음 해보네요(웃음).”

-목소리 작다는 지적을 많이 들었나 보다.
“목소리가 원래 작았어요. 이게 정말 싫었어요. 심한 콤플렉스였죠. 평소에 좀 크게 말해야 하나 싶기도 해요.”

-송강호가 말하길, 평소 조용조용한데 카메라 앞에만 서면 변한다더라. 천상배우가 아닌가.
“직업이니까 먹고 살려고 처절하게 발버둥치는 거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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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로서 본인의 장점과 단점을 꼽는다면.
“장점은 쑥스러운데… 무슨 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하나 뽑자면, 성실이라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거 하나가 저의 가장 큰 무기거든요. 성실하게 해온 게 10년 동안 조금씩 쌓이지 않았나 싶어요. 10년 전 찍은 영화들을 보면 제가 봐도 너무 못하더라고요(웃음). 단점도 성실. 성실하고 재미없고….”

-어떤 노력들을 해왔나.
“그냥 매 작품 충실하게 최선을 다한 것 같아요. 단편영화를 참 많이 했어요. 그게 자양분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얼마 전에도 단편멜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찍었어요.”

-단편영화에 유독 애정을 갖는 이유가 있나.
“고향 가는 느낌이 있어요. 소수 인원이 의기투합해서 같이 장비 들고 다니면서 찍고, 땀 분장도 혼자 물 뿌리면서 하고(웃음). 그런 열정을 추억해본다는 게 즐거운 일인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하고 싶습니다.”

-배우라는 직업, 앞으로 계속 해나갈 자신 있나.
“자신은 없는데 의지는 있어요. 다른 직장인들이 매일 먹고 살기 위해 노력하듯 저도 작품 할 때 충실해야죠. 그게 배우로서 해야 할 일인 것 같아요.”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