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 주도의 창의적 연구를 지원하는 사업이 확대돼야 해요. 영국의 ‘할데인(Haldane)’원칙처럼 정부가 일일이 간섭하지 않고 연구자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합니다.”
100여명에 가까운 과학자들이 연구자 주도의 기초과학 연구 지원 확대를 위한 청원운동에 나서 주목된다.
서울대 의대 호원경(사진) 교수는 지난 23일 이 같은 내용의 청원서를 포스텍이 운영하는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 사이트 소리마당에 올렸다.
청원에 동참하는 과학자는 25일 저녁까지 92명에 달했으며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김빛내리, 강봉균, 노정혜 교수, 포스텍 생명과학과 류성호 교수,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최준호 교수 등 이름있는 과학자들도 이름을 올렸다.
호 교수는 청원서에서 “최근 기초 연구의 위기 상황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면서 “정부와 국회의 연구개발(R&D) 정책 결정자들에게 청원한다”고 밝혔다. 그는 “현장의 과학자들은 정부가 지속적으로 R&D 투자를 확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초연구는 점점 위축되는 위기 상황임을 느끼고 있다”고 운을 뗐다. 이어 “기초연구의 위기는 단지 대학의 위기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나라 과학 경쟁력의 위기이며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협하므로 국가 미래의 위기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호 교수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연구개발비 예산 수립 및 집행에 대한 근본적인 구조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한다”면서 청원의 배경을 설명했다.
과학자들은 “정부의 기초연구 지원이 원천 지식의 창출이라는 본래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연구자 주도의 창의적 연구를 지원하는 ‘자유공모 기초연구지원사업 확대’를 주장했다.
현재 이런 사업은 한국연구재단의 기초연구지원사업 뿐으로 정부 전체 R&D의 6% 미만이다. 선진국 수준으로 확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또 현재의 연구자 주도 기초연구지원은 소액과제에 편중돼 ‘수월성 추구(수준있는 연구)’가 불가능한 반면, 정부 주도의 국책 연구는 점점 대형화되는 연구비 구조의 불균형을 개선해 달라고 촉구했다. 현재 자유공모 기초연구비는 5000만원 이하 과제가 과제 수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이를 1억원 이상 과제가 50% 이상이 되도록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책 사업의 대형과제 쏠림이 심각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과제 규모의 적정성을 검토해 지나친 대형화를 지양하고 국책 사업 내에서도 보다 많은 연구자에게 공정한 참여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R&D가 단기적 상황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먼 장래를 위한 꾸준한 투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지적도 나왔다. 호 교수는 “영국의 '할데인 원칙'처럼 정부는 연구비만 주고 연구 주제나 방법 등은 연구자에게 맡기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 교수는 26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최근 돈 안되는 연구를 최대 30년간 지원키로 한 카이스트의 ‘그랜드챌린지 30 프로젝트'처럼 대학의 연구 관행 변화도 필요하지만 정부가 R&D 방향의 ‘큰 그림’을 그리고 바꾸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호 교수는 조만간 과학자들의 자필 서명을 받은 뒤 국회에 청원서를 전달할 예정이다.
한편 미래창조과학부는 지난해 대학에 4조3000억원(전체 R&D 18조9000원의 22.6%)의 연구비를 투자했으며 자유공모 방식의 기초연구 사업에 지난해 1조800억원, 올해 1조1100억원을 투자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또 자유공모 방식의 기초연구 사업 예산을 2018년까지 1조5000억원으로 늘리기로 지난 5월 대통령 주재 과학기술전략회의에서 제시했으며 내년 예산에도 1600억원을 증액 반영했다고 덧붙였다.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