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정’ 허성태 “대기업 나와 알바, 연기하니 행복” [인터뷰]

입력 2016-09-25 18:59 수정 2016-09-25 21:28
한아름컴퍼니 제공

‘딴따라 딴따라다~ 따라다라다다~♪’

듣자마자 흥얼거리게 되는 익숙한 멜로디. 최근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허성태(39)는 자신의 휴대폰 통화 연결음을 손수 들려줬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메인 OST ‘돈 렛 미 비 미스언더스투드(Don't Let Me Be Misunderstood)’였다. 8년째 그대로라고 했다.

“김지운 감독님과 송강호 선배 팬이었어요. ‘놈놈놈’을 정말 좋아했죠. 그러니 떨릴 수밖에요. 함께 작업한 것만으로 영광이었습니다.”

허성태는 영화 ‘밀정’에서 일본 경찰 하시모토(엄태구)의 정보원 하일수 역을 맡았다. 의열단 내부 스파이로부터 정보를 빼돌리는 인물이다. 중간 중간 등장한 그를 눈여겨본 관객은 많지 않을 테다. 분량만 놓고 본다면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그에게는 연기인생 중 만난 가장 큰 역할이었다.

번듯한 대기업을 다니던 허성태는 우연한 기회에 연기를 시작했다. 술김에 출연신청을 한 SBS 연기자 오디션 프로그램 ‘기적의 오디션’(2011)이 그의 인생을 뒤바꾸었다. 연기를 향한 열정 하나로 지방에서 일하던 아내를 두고 무작정 홀로 상경했다.

배우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원룸에서 생활하며 각종 드라마나 영화 단역을 전전했다. 출연작만 벌써 120여편(단편영화 60편·드라마 60편)에 달한다. 생활비가 턱없이 모자라 아르바이트도 쉬지 않았다. 그러다 운명처럼 만난 작품이 ‘밀정’이었다. 송강호(이정출 역)에게 뺨 맞는 장면을 직접 제안했을 정도로 열의를 불태운 이유가 짐작이 된다.

워낙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는 허성태는 역할이 크든 작든 다작(多作)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어린 애 같은 이유지만, 그러면 영화 볼 때마다 내가 나오지 않겠느냐”며 웃음 짓던 그는 “죽을 때까지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밀정’에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오디션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갔죠. 1차에 합격하고 2차 때 김지운 감독님을 뵀어요. 1시간 반 정도 여러 디렉션에 맞춰 연기했어요. 너무 떨리고 정신이 없어서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잘 해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오디션 때 감독님이 어떤 주문을 하시던가.
“사실 제가 준비한 하일수는 눈치를 많이 보고 간사한 느낌이었거든요. 그런데 감독님께서는 최대한 건조하게 가길 원하셨어요. 방향을 잡아주신 것 같아요. 쓸 데 없는 호흡을 다 빼버리고 드라이하게 갔죠.”

-캐스팅 확정된 뒤 촬영 전까지 어떻게 지냈나.
“첫 촬영 때까지 6개월 동안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어요. 잘 해야 된다는 고민만 많고 방법이 없어서요. TV를 보면서도 계속 대사만 중얼거렸어요. 그것 말고는 제게 의미 있는 게 별로 없었어요.”

-엄태구에게 정보를 전하다 송강호에게 뺨 맞는 장면이 단연 눈길을 끈다.
“제가 제안했어요. 3박4일 동안 송강호 선배를 설득했죠. 제가 대사를 치는 순간에 뺨을 때리면 이정출의 요동치는 마음이 극대화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촬영 당일 날 김지운 감독님이 오셔서 ‘너 오늘 뺨 맞을 수 있다’고 얘기해주시더라고요. 담담하게 ‘괜찮습니다’ 대답했는데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죠. 8번 찍었는데 제일 아팠던 신이 영화에 나왔어요. 그 날 강호 선배님이 미안하셨는지 (휴대폰)번호를 주시더라고요(웃음).”


-송강호가 평소 해준 조언이 있나.
“저는 사실 ‘밀정’ 끝나고 연락 안 하실 줄 알았거든요? 근데 촬영이 없거나 저녁식사 하실 때 ‘괜찮으면 오라’고 연락을 주시더라고요. 연기 고민 있을 때도 언제든 전화하라고 해주시고…. 선배님께서 ‘너는 자신감을 더 가져야 된다. 신인이라고 해서 자꾸 움츠러들지 마라. 현장에서 좀 더 편해질 필요가 있다. 절대 기죽지 말라’는 얘기들을 해주셨어요. 너무 감사하죠.”

-엄태구와 붙는 신이 가장 많았다. 중국 촬영도 함께해 많이 친해졌겠다.
“태구는 원래 말이 별로 없는 편인데 이상하게 나한테만 장난을 많이 쳐요(웃음). 서로 놀리면서 긴장을 풀었어요. 정말 착하고 멋진 친구예요. 제가 배운 점도 많아요. 연기할 때 태구의 첫째 지론은 ‘실제로 해야 된다’는 거예요. 끊임없이 스스로 그걸 자각하는 태도도 대단한 것 같아요.”

-김지운 감독님은 어떤 스타일이던가.
“감독님과 소통을 잘 하려면 순발력이 정말 많이 필요해요. 대사를 전날 밤에 주시거나 현장에서 신 자체를 바꾸시는 경우도 있어요. 저는 또 잘하고 싶잖아요. 그럼 미치는 거죠. 그날도 잠을 못 자요(웃음). 촬영할 때 ‘잘했다’는 칭찬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러니까 오케이를 받아도 뭔가 찝찝한 거죠. 지나고 보니까 그냥 순수하게 받아들이면 되는 분이라는 걸 알았어요. 촬영 끝나고 감독님이 어깨동무하시며 ‘수고했다’고 해주시는데 울컥하더라고요. ‘진짜 끝났구나. 더 잘할 수 있었는데’ 그런 아쉬움이 들었어요.”(*이 말을 하면서도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기적의 오디션’ 출연 전 다닌 회사는 언제 그만뒀나.
“1회 방송이 부산 예선이었거든요. 그 녹화를 끝나고 바로 다음 날 회사에 가서 그만둔다고 얘기했어요.”


-아내의 반대는 없었나.
“저희가 연애 10년하고 결혼 5년째인데, 와이프는 저보다 더 성격이 호탕해요. 반대하지 않았어요. 그간의 제 모습을 다 봐온 거죠. 끼나 책임감 같은 거요. 하다가 그만두더라도 다른 일을 찾으면 되지 않느냐고 응원해줬어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어쩔 수 없었어요. 연봉 7000만원에 37평짜리 아파트가 있었는데 다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죠. 이제 월세를 못 내면 나가야 하는 신세니까 더 굳게 결심을 했어요. 어떻게든 연기로 돈을 벌고 싶어서 단역을 시작했던 거예요. 그래도 알바는 했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완구 포장 알바를 했죠.”

-후회한 적은 없는지.
“그 과정의 연속인 것 같아요. 매번 잘할 순 없으니까요. 연기를 잘 못했으면 자괴감에 빠졌다가 또 행복해져요. 때로는 두렵기도 해요. 그래도 힘든 게 후회는 아니잖아요. 칭찬 받으면 또 기분이 좋아져요(웃음).”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