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햇반, 스팸, 참치, 에너지바, 김, 생수, 우비, 침낭, 여벌옷, 응급상자, 물티슈, 휴지, 담요, 핫팩, 손전등, 보조배터리, 미니라디오, 호루라기, 생리대, 마스크.’
이모(30·여)씨가 남편과 함께 사는 대구 중구의 신혼집 신발장 옆에는 자질구레한 비상용품으로 꽉 찬 40리터짜리 등산용 백팩 두 개가 있다. ‘생존배낭’이다. 경주 일대에서 관측 사상 최대 규모 5.8의 지진이 일어난 지난 12일 온몸으로 공포를 겪은 뒤 준비했다. 19일 규모 4.5의 여진이 왔을 땐 이 배낭을 메고 밖으로 피했다. 이씨는 20일 “지난주에는 휴대폰만 들고 빈손으로 집을 뛰쳐나갔다”며 “트라우마가 생겨 우선 인터넷을 보고 집에 있는 물건으로 가방을 채웠다”고 말했다.
지진으로 ‘각자도생(各自圖生)’의 대비책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역대급 지진 앞에서 대응 체계의 무능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일주일 만에 찾아온 강력한 여진은 누적된 불신의 몸집을 불렸다.
부산 해운대구 아파트 36층에 사는 유모(56)씨 가족은 이사까지 고민 중이다. 유씨는 “새 아파트는 안전하다기에 호들갑 떨지 말자고 했지만, 아무래도 저층이 대피하기 쉬울 것 같아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다. 인테리어에 손을 대는 사람도 많다. 울산에 사는 강모(26·여)씨는 “인터넷에서 샹들리에와 액자를 떼어냈다는 글을 보고 침대에 설치한 선반과 그 위 책들을 치웠다”고 말했다.
지진 보험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손해보험협회 관계자는 “지진은 화재보험 특약, 풍수해보험, 재산종합보험으로 대비할 수 있는데 12일 지진 이후 관련 문의와 계약 성사가 급증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만든 지진 어플리케이션은 기상청보다 믿을만하다는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끈다. ‘유레쿠루 콜(Yurekuru call)’이란 앱은 지역 설정에 따라 경주 일대 지진까지 감지해 실시간 알림을 보낸다.
사람들이 각자 적극적으로 ‘살 길’을 찾아 나선 것은 삐걱거리는 국가 ‘재난 컨트롤 타워’의 모습을 거듭 목격한 탓이다. 지진 대피요령 등을 안내해야 하는 국민안전처 홈페이지는 12일 지진 발생 직후 3시간 동안 접속이 안 되더니 19일에는 2시간가량 먹통이었다. 긴급재난문자는 12일 반경 200㎞ 일대에 전송되기까지 9분이 걸려 ‘뒷북 긴급’이라는 비판을 받았는데, 19일에는 부산·울산·경북·경남 등 반경 80㎞ 지역에 전송되는데 14분이 걸렸다.
불신과 불안을 틈타 지난 7월 부산·울산지역에 퍼졌던 가스냄새가 지진의 ‘전조현상’이 아니냐는 우려도 재조명받고 있다. 민관합동조사단은 부취제와 화학공단 악취를 원인으로 지목한 바 있다. 지진과 무관하다는 전문가 분석에도 ‘지진운’ 등에 대한 뜬소문도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전문가들은 유언비어를 경계하되 지진에 대한 경각심은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영석 부경대 지구환경과학과 교수는 “사료 등을 바탕으로 보면 한반도에서 최대 규모 7 수준의 지진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조원철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명예교수는 “가족끼리 비상시 피난계획을 세우고 실제 3번 정도 연습해두면 도움이 된다”며 “내 목숨은 내가 지킨다는 의지는 긍정적이므로 경각심을 꾸준히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수민 임주언 기자 suminism@kmib.co.kr
생존배낭에 이사까지… 지진 공포 ‘각자도생’ 나선 사람들
입력 2016-09-20 1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