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11일만에 500만명 이상 관객을 끌어들이면서 거센 흥행 돌풍을 이어가고 있는 영화 ‘밀정’(감독 김지운). 흥행과 더불어 영화 속 배우 송강호가 연기한 ‘이정출 경부’가 일제시대 실존인물인 ‘황옥 경부’를 모델로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황 경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또 역사학계에서도 황 경부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있는 가운데 서울대 조국 교수가 황 경부의 친손자와의 인연에 대한 글을 남겨 화제가 되고 있다.
조 교수는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영화 ‘밀정’의 주인공 ‘이정출’의 실제 인물 황옥(黃鈺·1887~?) 경부의 친손자는 1983년 서울대 반독재시위를 주동하던 중 도서관에서 추락하여 사망한 황정하 열사(1960-1983)입니다(http://www.snujn.com/news/17898”라는 글을 올렸다. 그는 또 “당시 저는 대학교 2학년으로 추락 장면을 직접 목격하여 충격에 빠진 경험이 있다”고 했다.
조 교수는 “의열단장 김원봉의 증언을 토대로 박태원이 해방직후 출간한 책 <약산과 의열단>은 황옥은 독립운동가로 적고 있습니다. 황옥의 친동생 황직연(1890~1943)은 사회주의 운동을 벌이다 대전형무소에서 순국합니다. 여전히 논쟁의 대상으로 미스테리한 인물인 황옥의 삶에 대해서는 이하 참조하세요”라며 ‘http://blog.naver.com/toschi/110093250516’라며 링크를 걸어놨다.
아래글은 조 교수가 소개한 블로글 글의 전문.
한두리의 장수 황씨와 황옥의 활동
1. 한두리와 장수 황씨
한두리라는 뜻은 조선중기 집성촌이 형성되면서 대도촌(혹은 도촌 : 道와 德을 닦는 군자가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하였는데 우리말로 한두리라 불렀다. 한두리는 한 들 또는 큰 들을 뜻하기도 한다. 이곳에 장수 황씨가 살게 된 것은 조선조 황희의 증손 정과 그의 아들 사웅이 1516년(중종 11년) 상주 중모현에서 용궁현 무이를 거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이 장수 황씨의 입향조라 한다. 황시간(1558~1643)과 그의 손자인 황상중 대에 상주지방의 향반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황상중 때 남인 지방에서 노론으로 전향을 시도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상주의 서인계 신석번, 민정중의 문인으로 교우하였고 상주지방의 대표적인 서인가문 창녕 성씨와 혼인관계를 맺었다. 그는 1663년(현종 4) 남인과 서인의 극렬한 대립을 가져온 우율승무2)에 대한 찬승소를 올렸고 1678년 우암 송시열에 대한 찬승소와 변무소를 올림으로써 조선 후기 노론계열로 기호지방과의 인맥과 정파를 이루게 되었다.
2. 도천소학교 설립과 운영
한두리 인사들은 근대에 접어들어 기호지방 인사들과 교우하면서 한양을 내왕하였다. 이들은 문중의 앞날을 보전하고 제자 교육을 위해 이 지방 다른 어느 가문보다도 먼저 단발과 개화에 앞장섰다. 이를 주도하였던 인물이 국민신보의 집필로 있었던 황의필이다.
한두리에 사립도천소학교를 설립하게 된 배경은 1906년 3월 고종황제의 흥학조칙과 경북관찰사 신태휴의 흥학훈령을 발표였다. 문중에서 운영하던 도천서당을 근대식학교로 개편하여 설립하였다. 그러나 1907년 9월 3일 운강 이강년 의병부대에 의해 교사로 쓰던 종택 강당과 마을 전체가 소실되고 문중 인사들이 잡혀가 고초를 겪는 등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도천학교가 의병들에게 표적이 되었던 이유는 일진회에 의해 설립된 일인교사를 초빙하여 교수하고 주민들로부터 교비라는 명목의 학교운영비를 강제 징수하였다는 것이다.
의병에 의해 폭화를 당한 한두리 도천학교를 재건하려는 움직임 황철연(황옥)과 신태준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대구로 내려가 단지와 혈서로 경북관찰사 박중앙에게 도천학교를 지원해 줄 것을 청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한두리 개화인사들은 재경 영남인사들이 설립한 교남교육회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당시 문경군수 신용진의 신학문배척과 통감부의 사립 학교령을 계기로 1909년 폐교된다.
3. 황옥 활동의 양면성
(1) 성장과 재판소 서기
황옥(호 만적)은 1887년 5월 3일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의만과 어머니(성산이씨) 사이에서 3남3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장수 황씨 세보에 의하면 황철연으로 등재되어 있는데 1909년 3월 일제 통감부의 민적법이 시행되고 그가 고향을 떠났을 무렵 개명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도천학교 폐교 후 황옥은 통감부의 재판소 서기 겸 통역생으로 취직한다. 1909년 8월 16일 재판소 번역관보(판임관 4등 8급봉)로 서임되었다. 그해 11월 29일 평안북도 선천구재판소 평양구재판소 서기 겸 통역생으로 근무하게 된다. 총독부의 무단 통치 시기인 그의 청년기에 평양과 진남포재판소(1909~1911), 해주지방법원송화지청(1912~1919) 검사국 서기 겸 통역생으로 근무하였다.
(2) 3.1운동 직후 홍진과 상해 망명
황옥이 평양과 해주지방에서 재판소 서기 겸 통역생으로 근무할 때 평양에서 변호사로 활동(1909. 7~1919.2)하던 홍진과 친분을 쌓게 된다. 이들이 어떻게 활동했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난 바는 없다. 3.1운동 직후 황옥은 홍진과 함께 상해 망명하게 되는데 이규갑, 이명교, 한남수 등 국내 한성정부 수립 인사들의 상해 망명과 임시정부 활동을 주선하였다. 이때 임시정부 의정원으로부터 황옥뿐만 아니라 이들 모두가 밀정으로 의심을 받는다. 이유는 이들이 상해로 건너올 때 일제의 밀정으로 지목된 황옥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결국 황옥과 한남수는 국내로 돌아오고 이명교는 의정원에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3) 경찰간부 특채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파 활동
국내로 돌아온 황옥은 조선총독부 경찰조직이 확대됨에 따라 상해 임시정부에서 정탐한 내용과 검사국 경력을 인정받아 1920년 3월 경기도 경찰부 직속 도경부로 특채되었다. 그는 의열단의 대규모 국내 폭탄반입을 주도하여 1923년 3월 체포될 때까지 만 3년간 경기도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로 근무하였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는 식민지 조선을 비롯한 약소국을 대표하는 극동민족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경기도경찰부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사전대책에 따라 황옥을 밀정으로 하여 극동민족대회를 정탐하였다. 한편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1921년 5월 창립 직후 국내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이교담과 서초를 국내로 파견하였다. 이때 황옥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내지부 간부로 선임되었다. 그는 최초 사회주의 노동단체인 조선노동대회를 주도하면서 극동민족대회 국내대표단을 선발하는데 관여하였다. 대표단중에 의열단의 제2차 국내총공격을 위한 대규모 국내폭탄반입과 관련되어 자금 모집을 담당하던 권정필, 이 사건의 주모자 김시현 그리고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로 활약한 김재봉, 밀정으로 파견한 민족운동가 성욱환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황옥이 관련된 조선노동대회 위임장과 국경 통과를 위한 총독부 여행증을 발급받은 안동과 상주 출신 민족운동가들이었다.
각 단체 대표 13명의 위임장은 황옥의 집에서 만들어졌다. 황옥은 이들에게 모스크바로 안전하게 떠날 수 있도록 조선총독부의 여행권을 발급하고 김시현에게 여비까지 지급하였다. 그는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내지부 간부로 국내 대표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김시현을 비롯한 몇몇 인사들을 천거하고 극동민족대회에 파견될 국내 대표를 선정하는데 직접 관여하였다. 또한 국내 노동단체 대표로 인정되는 위임장과 국경 통과를 위한 총독부 여행증까지 만들어주었다. 황옥의 집에서 만들어진 조선노동대회 위임장은 조그마한 명주조각으로 만들어졌다. 일제의 간부로서 황옥의 이러한 행위는 결국 고려공산당으로부터 의심을 당해 배척당하였다.
(4) 의열단 가입과 제2차 국내총공격을 위한 폭탄반입 주도
의열단의 제2차 대규모 암살파괴 계획은 이른 바 대규모 국내 폭탄반입사건으로 일명 황옥경부폭탄사건(황옥사건)이라 한다.
의열단원인 김시현은 1922년 고려공산당원 장건상과 회담한 결과 김원봉과 국내 폭탄을 반입하여 파괴 암살을 실행하기로 하였다. 그는 국내 폭탄 반입 방법에 대해 탐지하기 위해 경성에 와서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근무 도경부였던 황옥에게 계획을 말하고 협력을 제의한다. 황옥은 처음에는 응하지 않았다가 참가하여 협력할 것으로 승낙한다. 황옥과 김시현은 1920년에 서로 면식이 있었는데 극동민족대회 참석 후 김시현이 황옥의 집에 머무르면서 점점 친교를 맺게 되었다.
김시현은 황옥과 협의하여 폭탄 반입 및 동지들의 왕래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홍종우를 중국 안동현으로 보내 조선일보 안동지국장으로 임명하였다.
1922년 12월 30일경 황옥은 김시현과 동행하지 못하고 김시현만 천진으로 가 장건상, 김원봉과 폭탄 투척에 대한 협의를 하였다. 1923년 2월 초 김시현은 국경경비상황을 정찰하기 위해 안동현에 갔다가 다시 천진으로 돌아오자, 때마침 홍옥이 다른 관명을 띠고 유석현과 함께 천진에 와 있었다. 황옥은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하한 범인 수사를 위해 경기도 경찰부장으로부터 천진에 출장 명령을 받았다. 당시 황옥은 유석현을 밀정으로 위장하여 김세진이란 가명 아래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경부보 교본청과 함께였다. 교본 경부보는 일본 조계내 태양여관에 투숙하였으나 황옥은 유석현을 데리고 프랑스조계의 중국여관에 투숙하였다.
황옥은 이때 유석현의 소개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김시현, 황옥, 김원봉, 유석현 등은 함께 조선내에 폭탄 반입을 숙의하였다. 3월 초경 황옥이 숙박하고 있는 천진 프랑스조계 내 중국여관에서 김시현이 김원봉으로부터 대형 폭탄 6개, 소형 대추형 폭탄 20개, 술병형 폭탄 10개, 그 부속 폭발장치용 시계 6개, 뇌관 6개 및 조선독립에 관한 불온문서(조선혁명선언, ‘조선총독부 관공리에게’ 등) 수백장을 받았다.
그러나 폭탄은 사용하지 못한 채 발각되고, 평북경찰부 신의주경찰서와 경기도경찰부에 의해 총 28명의 연루자 중 18명이 구금되고 폭탄 36개와 권총 5정, 불온문서 다수 등이 압수되었다. 1923년 3월 17일과 19일에 유석현, 황옥이, 30일에 김시현이 체포되었다. 1923년 8월 7일과 8일에 걸쳐 경성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있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밀정정치에 의해 일어난 사건으로 황옥에 대해 ‘의심할 점’, ‘의문의 인물’로 보도되고 온갖 추측성 기사와 설이 난무하였다.
<김시현의 진술>
황옥의 덕택으로 제포를 면할 수 있었고, 또 동지들도 그로 인해 큰 편의를 보았으므로 황옥이 동지의 한 사람임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 황옥은 경부이기는 하지만 실은 우리들과 같은 조선독립운동자의 한 사람임을 장건상에게 전했다.
<황옥의 법정진술>
“김시현으로부터 폭탄을 넘겨받아 경찰부에 압수시키려고 한 것과 경찰부에 미리 보고하지 않은 것은 상해로부터 실행자가 오면 모두 검거하기 위함이었다.”
<변호사 포시진치(김지섭의 동경의거 공판 변론)>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일부러 경관을 공산당에 가입케 하여 희생적 정신을 가지고 사람들을 속이며 잡으려는 것은 정치 도덕상 가만히 볼 수 없는 터”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전 현직 경찰부장 백상우길과 마야정일을 증인으로 신문해 줄 것을 법정에 요구
<황옥의 법정 최후 진술>
“경찰 관리로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면 장차 경시까지 시켜 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죄 없다고 변명하였다.
<조선일보 논평>
(전략) 황옥의 발언은 소위 경관의 신분으로 김시현 이하 죄인의 범죄사실을 유도 촉성하였으며, 범인의 심리에 영합하여 의열단과 경기도경찰부의 중간에서 간계와 농락으로 양쪽을 모두 사기한 매우 음험하고 교활한 행동이라고 하였다. 또한 황옥은 죄안을 작성하고 그들을 체포함으로써 공을 차지하려 하였고 전 경찰부장의 지시로 공산당원을 가장하여 기밀비를 챙기고 김시현에게 민족대회에 출석하는 여비로 제공하였다 함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황옥은 김시현과 같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4) 그러나 3차례에 걸쳐 은사와 감형 조치로 징역 4년 2개월 18일로 감형되었다.
(5) 이후 활동과 가족들
황옥은 1929년 2월 1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출옥한 후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 행적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김시현은 길림 천진 북경 등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지만 황옥은 드러난 행적이 없다. 그는 경성에 머물면서 의열단 동지들, 백산 안희제 등을 만나며 대구에서 약목과 만주로 오가며 독립군활동을 위해 광산경영을 하고 있던 박시목 윤홍열 등 영남 인사들과 교유하였다고 밝혀질 뿐이다.
황옥은 해방되자 김시현과 함께 1945년 10월 권동진, 오세창, 김창숙 등 44명으로 구성된 조선독립운동사편찬발기인회에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조선충의사를 설치하여 순국열사들의 충혼을 위로하는 위령제 해방기념탑의 건설 등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황옥은 1946년 10월 미군정경찰 제3경무총감부(대구)를 거쳐 제2경무총감부(전주)에서 경무총감으로 정부 수립 전까지 근무하였다. 그는 그해 9월 미군정 경찰조직이 개편되자 경무부장 조병옥의 천거로 경남부와 충북의 경찰조직을 감독하는 대구의 제3경무총감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황옥은 1949년 5월 20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반민자 김태석(당시 황옥의 상관으로 친일 악질 경찰)5)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의열단 사건을 증언하였다.
정부 수립 후 정치활동에 나선 황옥은 1949년 10월 김성수 백남훈 신익희 백관수 김동원 등 39명으로 구성된 민주국민당 중앙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여기에 김시현은 김효석, 윤보선, 허정 등 9명과 함께 고문으로 선출되었다. 황옥은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파주에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되고 황옥은 1950년 7월 17일 납북되었다. 황옥의 북한에서의 활동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전쟁 중 휴전회담이 열리는 가운데 평양의 대남방송을 통하여, 북한노동당의 통일정책과 외국군 철수를 주장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황옥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일영은 6.25 전쟁 중에 부인과 아들을 잃었다. 이후 일영은 둘째 부인을 맞이하여 아들 정하 하나를 두었다. 황정하는 서울대학교 도시공학과 4학년으로 1983년 11월 8일 전두환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교내에서 민주화 투쟁을 선언하고 주도하였다. 황정하를 비롯한 6명의 학생들이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민주화 투쟁’을 선언하고 교내 시관 6층 창문을 통해 밧줄을 타고 내려가던 중 추락하였다. 그러나 그는 경찰의 제지와 방치로 인하여 11월 16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사망하였다.
한장희 기자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