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한국 드라마와 가요가 한류 열풍을 일으켰다면 한국에서는 일본 소설과 희곡을 앞세운 ‘일류(日流)’가 만만치 않다. 특히 연극계의 경우 2000년대 중반부터 매년 20~30여편의 일본 희곡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 한국 희곡은 주목받지 못했다. 일한연극교류협의회를 주축으로 한국 희곡 낭독회가 열리거나 작은 민간 극단에서 3~4일 짧게 공연하는 수준이었다. 정의신(재일교포), 히라타 오리자, 미타니 코키 등 일본 작품이 장기공연에 따른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다.
그런데, 오는 10월 일본 대형 상업 프로덕션에서 한국 희곡을 가지고 제작한 연극이 처음 무대에 올라간다. 일본 굴지의 영화·공연 제작사이자 매니지먼트사인 호리프로는 10월 7~30일 한국 극작가 이강백의 ‘북어대가리’를 도쿄 은하극장(746석)에서 28회 공연한다. 일본 신국립극장 예술감독을 역임한 스타 연출가 쿠리야마 타미야가 연출을 맡았고 후지와라 타츠야, 야마모토 유스케, 나카무라 유리, 키바 카츠미 등 스타 배우 4명이 출연한다.
티켓 가격은 9800엔(약 10만5000원), 25세 이하 5500엔(약 6만원)이다. 한국에선 연극 티켓 가격이 5만원을 넘는 경우가 드물지만 일본에서 상업 프로덕션 연극은 10만원을 웃돈다. 이 작품은 도쿄 공연 이후 11월엔 오사카, 후쿠오카 등 6개 도시 투어를 가진다.
‘북어 대가리’는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극작가 이강백(69)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1993년 발표된 이 작품은 창고지기 2명의 대조적인 모습을 통해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에 매몰돼 텅 빈 껍데기처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렸다.
이 작품의 일본어 번역을 맡은 이시카와 쥬리 한일연극교류협의회 전문위원은 “호리프로 프로듀서가 일본에 번역돼 있던 이강백 선생님의 희곡집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됐다”면서 “후지와라 타츠야처럼 티켓 파워가 높은 스타 배우가 한국 연극에 출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작품이 일본에서 한국 희곡의 위상을 높이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또 대학로의 대표적 코믹 연극 ‘죽여주는 이야기’(이훈국 작·연출)는 지난 7일부터 13일까지 일본 영화 및 공연 제작사 언스토퍼블 필름을 통해 ‘트라이앵글-인생 최후의 날’이란 제목으로 도쿄 스미다파크 스튜디오 소우(150석)에서 공연중이다. 공연 횟수는 15회, 티켓 가격은 4200엔(약 4만5000원). 지난해 테스트 차원의 3회 공연이 큰 인기를 끌자 올해 횟수를 5배 늘렸다. 작품의 저작권을 가진 한국 제작사 삼형제 엔터테인먼트의 이훈제 대표는 “올해 공연도 첫날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매진됐다. 일본 제작사가 내년 1월 다시 횟수를 늘려 공연에 들어갈 예정이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일본의 여러 상업 프로덕션에서 한국 희곡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대형 제작사 토호는 김광림의 ‘날 보러와요’를 일본 배경으로 각색해 공연하는 것을 추진중이다. 또 나토리 사무소는 영화 ‘해무’의 원작인 동명희곡을 쓴 극작가 김민정에게 신작을 의뢰했다. 김민정이 쓴 ‘갈애(渴愛)’는 내년 공연을 목표로 현재 일본어 번역 작업 중이다.
일본에서 극단 세아미를 이끄는 연출가이자 한일 연극 교류 코디네이터로 활동하는 김세일은 “최근 일본의 여러 제작사가 상업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높은 한국 희곡을 찾고 있다. 우선 희곡 저작권료가 영미권과 비교해 높지 않은데다 일본과 정서적으로 통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면서 “한국에서 이미 검증받은 작품은 일본에서도 통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