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 역할의 변화가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혹여라도 여자아이들은 인형을, 남자아이들은 장난감 총을 갖고 놀아야 한다고 했다가는 낡아빠진 성 역할을 고착화시키려 한다고 벌떼같은 힐난에 시달려야 한다. 실제로 이제까지 남자들이 주로 맡아온 일이라든가 활동영역에 여성들이 많이 진출했다. 일례로 해외의 전쟁터로 싸우러 가는 건 총을 든 여성이고, 남편은 아이를 안고 그 여성을 배웅하는 장면을 쉽게 TV 뉴스화면에서 볼 수 있다. 멀리 전장에 나간 남편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베를 짜는 안드로마케의 이야기는 흘러간 꿈이다.
이런 변화가 영화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영화를 리메이크하면서 오리지널의 남자배우들이 맡았던 역할을 여자배우들에게 맡기는 움직임이다. 일종의 ‘성전환’이라고나 할까.
우선 지난 7월 미국에서 개봉한 ‘고스트버스터즈’. 초자연현상을 연구하는 괴짜 과학자들이 팀을 이뤄 뉴욕시에 출몰하는 유령들을 퇴치한다는 코미디인 이 영화는 원래 1984년 빌 머레이, 댄 애크로이드, 해롤드 래미스, 그리고 어니 허드슨 등 남자들이 주연을 맡아 비평과 흥행 모두 큰 성공을 거뒀다. 여자 출연자로 시거니 위버가 있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양념’이었을 뿐. 이후 이 영화는 1989년에 여전히 남자 일색의 주연으로 속편이 나왔다. 감독은 1편과 마찬가지로 이반 라이트먼. 속편 역시 흥행에 성공했다.
그런 영화를 소니 픽처스가 32년 만에 리메이크하면서 주연을 몽땅 여자로 바꿔놓았다. 감독은 뚱뚱한 아줌마를 스파이로 변신시킨 액션 코미디 ‘스파이(2015)’를 만들었던 폴 피그, 주연은 ‘스파이’의 히로인이었던 멜리사 맥카시와 수많은 정상급 코미디 배우를 배출한 NBC의 장수 코미디프로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고정출연자 출신인 크리스텐 위그, 케이트 맥키논, 레슬리 존스 등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여자 코미디 배우들. 그렇다고 남자 출연자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무적의 망치를 휘두르는 슈퍼 히어로 ‘토르’ 역할로 유명한 크리스 헴스워스도 나오지만 그 멋진 사나이를 ‘영구’급 바보로 만들어놓았다.
문제는 여성판 ‘고스트버스터즈’가 비평이나 흥행에서 그리 신통치 않다는 점. 이 영화는 코미디영화치고는 무척 많은 1억4400만달러의 제작비가 들었다. 거기에 마케팅비가 적어도 1억달러 추가됐다. 그런 만큼 전 세계에서 최소한 3억달러는 벌어들여야 수지타산이 맞는다. 그런데 개봉 후 한 달 동안 미국 포함 전 세계에서 벌어들인 수입이 1억8000만달러였다. 앞으로도 전망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영화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2500만~7500만달러의 적자가 예상된다는 보고다.
무엇보다 여성 주연들이 그렇게 관객들에게 어필하지 않은 탓이다. 오리지널의 남자 주연들이 워낙 뚜렷한 족적을 남긴 탓에 여성 주연들이 그들을 넘어서기 버겁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관객들에게 이 영화를 보러 온 이유를 물었더니 여성 주연들 때문이라는 답은 세 번째에 불과했다. 물론 페미니스트를 비롯해 특히 젊은 여성들은 여성판에 열광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오리지널처럼 속편을 이어갈지는 불투명하다. 피그 감독은 개봉 초기의 좋지 않은 평과 신통치 않은 흥행성적 탓인지 절대 속편을 만들지 않겠다고 밝혔으나 소니 관계자는 속편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어쨌거나 이 영화는 특히 페미니스트들로부터는 환호를 받고 있다. USC 대학 커뮤니케이션 및 저널리즘 학과의 스테이시 스미스 교수는 종래 여성들을 과학과 기술, 공학 그리고 수학분야에 접목시킨 영화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데 반해 2016년판 고스트버스터즈는 여성들을 이 분야에 진출시켰다며 높이 평가했다.
두 번째 ‘성전환’ 리메이크영화는 도둑질 영화 ‘오션스 일레븐(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2001)’을 여성판으로 만든 ‘오션스 에이트’다. ‘헝거게임’을 연출한 게리 로스가 감독을 맡아 오는 10월 크랭크인 할 예정. 원작의 주인공 대니 오션(조지 클루니)의 여동생(샌드라 불록)이 여자들만 모아서 ‘한탕 한다’는 내용이다. 원작과 다른 것은 제목이 말해주듯 팀 멤버가 11명이 아니라 8명이라는 것. 그러나 오리지널이 클루니 외에 매트 데이먼, 브래드 피트 등 초호화 남자 캐스트를 기용해 흥행에 큰 성공을 거뒀듯 오션스 에이트도 거물급 여성 출연자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팀을 이끄는 불록 외에 케이트 블랜쳇, 앤 해서웨이, 헬레나 본햄 카터가 가세한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음반을 2억장이나 팔아치운 가수 리애나와 시트콤 코미디의 스타 민디 케일링, 래퍼 겸 코미디언 오콰피나가 든든하게 그 뒤를 받친다. 나머지 한사람은 아직 미정이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의 진짜 오리지널, 즉 루이스 마일스톤이 감독한 1960년판 ‘오션스 일레븐’이 프랭크 시나트라를 필두로 딘 마틴,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등 ‘랫팩’으로 통칭된 호화스타들을 총망라했던 이래 리메이크의 리메이크인 ‘오션스 에이트’까지 초호화 캐스트라는 ‘오션스~’의 전동은 면면히 이어지는 셈이다.
이외에도 원작의 남성을 여성으로 바꿔치기한 ‘성전환’ 리메이크 영화들이 줄을 이을 전망이다. 이소룡의 아들 브랜던 리가 주연을 맡았으나 촬영도중 사고로 사망해 더 유명해진 만화 원작의 영화 ‘크로우(1994,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 여기서는 악역 톱 달러가 여성으로 바뀐다고 한다. 신예 코린 하디가 연출을 맡는 이 영화는 현재 캐스팅 단계. 그러나 오리지널에서 마이클 윈코트가 맡았던 디트로이트의 악당 두목 톱 달러는 ‘오블리비언(조지프 코신스키 감독, 2013)’에서 톰 크루즈와 공연했던 앤드리아 리즈버러가 연기하기로 됐다고 한다. 다만 주인공 크로우는 그나마 남자로 남아있을 예정인데 당초 ‘신세대 벤허’ 잭 휴스턴이 물망에 올랐으나 현재는 DC코믹스의 만화 속 슈퍼영웅 중 하나인 아쿠아맨으로 유명해진 제이슨 모모아로 굳어져가고 있다고.
그리고 다음 타자가 크리스천 베일의 또라이 연기로 유명한 ‘아메리칸 사이코(메리 해론 감독, 2000)’의 리메이크다. 베일이 맡아 악명을 떨쳤던 변태 살인마 패트릭 베이트먼을 코미디언 겸 배우 겸 영화제작자 대니 페이스 레너드가 패트리셔 베이트먼으로 이름을 바꿔 맡을 예정. 재미있는 건 베일의 영화 속 동료로서 베일에 의해 토막살해 당하는 폴 앨런 역시 여자로 바뀐다는 것. 즉 원래 자레드 레토가 맡았던 폴 앨런은 역시 여성화한 이름 폴라 앨런으로 둔갑해 아역배우 출신 마라 윌슨이 연기한다고. 다만 이 영화는 극장용 영화가 아니라 비디오 시리즈의 하나다. 레너드는 종래 남성이 맡았던 역할을 여성이 맡는 것으로 바꾼 ‘바꿔치기(Swapped)’라는 이름의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다는데 이 영화가 1번 타자라고.
이처럼 남성을 여성으로 바꾼 ‘성전환’ 리메이크 영화들은 앞으로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그 대상이 될 영화들은 얼마나 무궁무진한가. 그러나 그 같은 성전환 리메이크 영화들이 오리지널의 맛과 향취를 해치는 일은 없을지 일면 걱정스럽다. 한번 상상해보자.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내내 여성의 대사라고는 한 줄도 들어가지 않은 채 남성만으로 만들어진 고전 걸작 ‘아라비아의 로렌스(데이비드 린 감독, 1962)’를 여성판으로 만든다고. 뭔가 전율스럽지 않은가.
김상온 (프리랜서 영화라이터)
[김상온의 영화이야기]<85> ‘성전환’ 리메이크
입력 2016-08-29 15:19 수정 2016-08-29 16: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