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 연극이야기] 43. 출구가 없는 절망을 노래하는 ‘니 애비의 볼레로’

입력 2016-08-23 11:28
김세한 작 ‘니 애비의 볼레로’ 는 2016 제2회 윤대성 희곡상을 받은 작품이다.연극저항집단 백치들의 안민열 연출로 제16회 밀양여름연극축제 젊은 연출가전에서 작품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한국사회에서 소외된 다문화 가족, 외국인 노동자, 코피노(kopino: 한국인 Korean과 필리핀인 Phillippino의 합성어로 한국인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 태어난 2세를 말함) 들의 이야기이자 아버지의 혈류를 찾아 한국에 온 한 코피노의 좌절과 한국사회에서 소외된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 가족들의 삶을 출구가 없는 절망을 애잔한 무대로 그려내고 있다.

타자들의 시선으로 부착된 불명(不明)의 이름표 “우리는 개새끼입니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혼혈혈류가 흐를 수 없는 혈전(血栓)된 사회다. 내면으로 흐르는 뜨거운 한국인의 혈류를 움켜쥐고, 비틀고 있는 냉소적인 시선은 정체성의 혼돈과 혼란으로 순수혈통주의를 외치는 한국사회는 넘어 설 수 없는 땅이다. 타자들의 냉소적인 시선과 폭력성은 삶을 파국으로 몰아넣고 희망은 거세 된 채 살아간다. 다문화가족 코피노 통계를 보자. 일그러지고 추악한 성문화로 필리핀 아동 단체와 교민단체 등은 한국인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코피노들이 최대 3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여성가족부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6년도 다문화 가족은 추산 86만명으로(귀화자, 배우자, 자녀 포함) 2020년에는 100만 시대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코피노를 양육하고 있는 필리핀 여성들 가운데 ‘떠나버린 한국인 남편’을 대신해 육아비용과 생계를 위해 현란한 클럽에서 버텨내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방송을 통해서도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사회가 희망과 기회의 땅에서 무참히 떠난 아버지의 나라 ‘코리아’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불편한 진실이다. 한 시사프로그램은 코피노 가족들을 취재했다. 카메라는 비좁은 골목을 따라 방 한 켠에서 온 가족이 힘겹게 살아가는 장면을 담았다. 방송 진행자가 사진 한 장을 들어 보인다. 7세의 코피노 아이에게 아빠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는지 물었다. 엄마 품에 바짝 안긴 채 너널거리는 장난감을 만지작거린다. 아이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확한 발음으로 천천히 한국인 아버지 이름을 기억에서 꺼냈다. 아이는 아빠가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면서 코리아를 삶에 희망으로 품고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로(임유송 분) 표상되는 극중 인물은 이름이 없다. 필리핀에서는 한국인으로 불려지고, 한국사회에서는 필리핀 사람이다. 이름의 부재(不在)는 내면의 정체성이 찢겨지고 파멸된 이방인의 슬픔으로 부착된 고뇌이자 불명의 이름표다. 한국인의 혈류가 흐르는 국기를 내면에 부착 할 수 없는 소외된 삶인 것이다. 김세환 작가는 이들 삶을 현실풍경으로 타격하지 않는다. 아라비안나이트 알리바바 이야기를 가공의 설화를 설정해 코리아를 환상으로 비쳐진 나라, 코피노 아버지의 땅을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로 환기시킨다.

알파벳과 자음과 모음이 뒤섞인 불명의 주소와 이름을 쥐어주고 떠나버린 아버지의 나라는 동화 속 나라다. 작가는 가공적 설화를 투영해 다화가족의 현재 삶을 병치시키며 극의 구조를 연결하고 있다. 알리바바의 성장의 이야기는 극중 인물(아버지)과 무희(엄마)의 내면의 욕망과 동일화 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열악한 노동으로 손, 발이 잘려 나가도 외국인 노동자에게 되돌아오는 말을 ‘개새끼’다, 한국사회의 타자들의 냉혹한 시선으로 응축된 내면은 ‛기회의 땅’ ‘ 돈 벌어 행복 하게 살 수 있는 나라’ 희망이 숨을 쉴 수 없는 삶의 욕망이 거세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라 ‘코리아’가 된다. 작가 김세환은 다문화 가족과 코피노들을 바라본 냉소적인 시선과 다소 무거울 수 있는 분위기들을 유쾌한 조롱의 언어로 반사시킨다. 인도인 유학생 아브찬 핫산( 김성규 분)이 ‘멋’을 ‘맛’으로 분절된 한국어 발음으로 “한국사람 맛(멋) 있어요” 의사소통을 반복적으로 시도하고 혼탁한 문화를 극에 반복적으로 연결해 한국사회 타자들의 시선을 치환 시킨다.

극중 인물 아버지(임유송 분)는 무희인 엄마의 영향으로 무용수가 되고 싶어 아버지 찾아 필리핀에서 한국의 땅으로 왔지만 주소를 들어 찾아간 아버지는 아들 존재를 부정한다. 핏줄의 혈류를 부정하는 절망, 코리아는 더 이상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나라가 아니다. “필리핀에서는 한국인으로 한국사회에서는 필리핀 사람이다. 코피노들. 그런 사람들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기껏해야 춤추면서 옷 벗는 일, 짐 옮기는 일, 공장일 이다.” 타자들의 냉소적이고 폭력적인 시선으로 응축된 아버지의 내면은 한국인으로, 한 인간으로 이름표를 부착 할 수 없다. 코리아에서 불리는 또 다는 이름 ‘개새끼’ 인 것이다. 는 이 두 가지의 시선으로 한국사회의 다문화 가족의 소외된 삶, 코피노의 사회적 문제, 미래 다문화 100만 시대의 진입사회에서 2,3세들의 혼혈혈류가 흐를 수 없는 혈전된 한국 사회를 향해 절망을 노래하고, 볼레로의 음악으로 희망을 전진하려는 이들 삶의 욕망에 끈을 조여 맨다.

출구가 없는 절망을 삶에 욕망으로 전진하는 무대는 허름한 옥탑 방이다. 무대 앞에는 붉은 원형의 밥상이 놓여 있고 뒤편으로 냉장고와 싱크대 그리고 간간이 펜이 돌아가는 허름한 선풍기가 살림살이가 전부다. 원작 텍스트에는 옥탑 방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마치 허름한 반지하의 방을 연상케 한다. 그 외벽을 두르고 있는 벽면은 혈전된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코피노와 다문화 가족들의 절망과 정체성의 부재, 타자들의 냉혹한 시선과 폭력성들로 응집된 소외된 출구 없는 절망의 피부를 들어낸다. 이들의 삶을 두르고 있는 방안 외벽은 마치 주인공 아버지(임유송)이 한국사회의 하늘을 향해 날지 못한 채 박제된 상징으로 형상화한다. 프롤로그에서도 붉은 밥상위에 올라서 볼레로 음악에 맞추어 절망과 희망의 날개 짓으로 극을 여는 장면은 닫힌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인 아버지에게 소외받고 외국인 노동자로 공장에서 일하면서 손가락이 잘려나가도 개새끼 소리를 들어야 하는 냉소적인 한국사회의 시선들로 응집된 내면의 파열음을 몸으로 노래한다. 이 날개의 벽면 중앙 뒤편 출구 쪽으로 단을 올려놓은 것은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주인공 알리바바의 가공된 성장설화의 공간이다.

배우들의 등, 퇴장을 무대 앞면으로 이동시켜 코리아를 기회의 땅, 성공의 땅, 아버지를 마치 아랍 슐탄의 왕자로 묘사된 가공설화로 여행을 떠나는 교차된 공간으로 이원화 된다. 외국인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족들이 한국의 땅에 정착한 일대기를 마치 설화적 성공 동화로 설정한다. 알리바바는 아버지 자신과 동일화된 성장기의 이야기다. 슐탄의 방직공장에서 일하며 손가락 하나를 잃은 알리바바는 코피노 자신의 내면인 것이다. 악착같이 고단한 노동의 현실의 견디고 살아가야 하는 한국사회는 술탄의 방직공장에서 일할 때보다도 적은 급료를 그들에게 쥐어주는 나라이다. 한국인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좌절과 정체성의 부재는 사창가에서 한 여자를 만나 동거하면서 이 여인이 떠나버린 뒤에도 두 아이(설란, 설찬)를 양육한다. 한국인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한국인 혈류의 부재된 결핍의 내면의 욕망은 아이러니 하게도 한국인의 핏줄이 흐르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자식으로 거두어들이고 지켜야 한다는 투절한 부성애적인 저항적 온기로 채워진다.

한국인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외국인 노동자의 삶으로 전진하지만 딸 설란을 서울대학까지 보내고 아들 설찬(박건일 분)은 기타를 치며 음악가의 꿈을 키운다. 극의 중심은 한국으로 유학 온 인도계 아브찬 핫산과 설란(박재선 분)의 관계다. 아브찬 핫산이 설란이 집을 방문하면서 대학 다문화 인권 동아리에 만나 임신한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작가는 한국사회의 다문화 가족을 바라보는 2세들을 바라보는 냉혹한 혼혈적 사회의 시선을 겨냥하고 이들 가슴에 어떤 태생적인 이름표를 한국사회가 부착 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아라비안나이트 삽화를 교차시키며 묻고 있다. 이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는 아라비안 라이트의 설화처럼 기회를 줄 수 있는 성공의 땅이다. 냉혹한 시선을 받으며 희망의 도시 코리아에서 살아가는 다문화 가족과 정체성이 부재된 피곤한 삶을 투영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에 삶, 강렬한 욕망과 정체성

1장에서 라벨의 볼레로 음악의 차용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냉혹한 시선을 뚫고 전진하려는 저항적 삶의 태도이며, 내면의 강렬한 욕망을 담아내고 있다. 이 장면에서 ‘여행을 떠나요’ ‘ 어쩌다 마주친 그대’의 곡과 리듬을 개사해 ‘설란이가 온다’로 바꾸어 부르는 장면은 이들이 현실을 견디고 기다려야 하는 삶이다. 설란 아버지가 한국사회 핏줄로 흐르는 정체성을 찾고 싶어 하는 강렬한 욕망은 고기 집에서 일 하면서 배운 파 무침 비법 개발이다. 코피노로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 가족을 형성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한국인의 손 맛 보다도 더 잘 무칠 수 있는 것은 한국인의 이름표를 부착하고 싶은 소외된 내면에서 출발한다. 
 2장 아시아 삼국에서 아브찬 핫산과 아버지가 설란을 기다리면서 나누는 고백적 대화는 가상설화인 알리바바 이야기처럼 아버지를 찾아 한국으로 떠나온 내면의 자전적 성장 동화의 세계다. 분절된 한국어 발음으로 “외국사람, 밤에 일도 잘 합니다.” 밤조사가 빠진 채 발음하는 아브찬 핫산의 반복적인 대사는 서툰 한국어 발음에서 터져 나오는 단어의 묘한 뉘앙스를 형성시키며 김성원은 외국인 유학생의 서툰 한국어 발음을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그러나 아라비안나이트의 가상의 동화의 세계로 이어지는 이야기 놀이형식의 극중극 장면에서 서툰 한국어 발음으로 아브찬 핫산을 연기하다가 정확한 한국말 발음으로 이야기 해설자로 분한 극중극 장면에서는 연결 흐름을 매끄럽게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차라리 외국인 유학생 신분의 극중 인물로써 서툰 한국어 발음으로 전달될 때 아라비안나이트 가상의 동화의 세계는 우리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우회적으로 환기 시킬 수 있다.

혼혈혈류가 날지 못하는 혈전(血栓)된 사회를 향해 강렬한 춤으로의 저항

극중 극의 전달되는 이야기세계 한국은 먼 나라로 모두가 왕자로 잘 살고 있는 부유한 나라다.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환영의 시선들이자, 알리바바의 설화의 주인공은 될 수 있는 땅이다. 그러나 아브찬 핫산과 교차되며 진행되는 아라비안나이트의 극중극(무희엄마의 이야기, 무용수의 꿈, 한국인 아버지를 찾는 여정, 외국인 노동자의 삶과 현실, 설란과 살찬의 엄마를 만나 게 된 과정)을 아버지는 알리바바처럼 더 이상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현실의 삶을 그린다. 설란과 아브라 핫산 그리고 살찬은 아버지가 들려주는 극중극의 여행을 통해 절망의 시선을 담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설란은 아브찬 핫산과의 임신한 아이를 낳겠다는 말을 하고 집을 떠나고, 설찬은 김광석의 노래 ‘거리에서’를 부른다. 이들이 걷고 있는 우리사회의 거리는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가족들에게는 고단한 삶의 거리다.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투영되고 있는 이들 내면과 정체성의 혼돈, 타자들의 냉혹한 시선으로 여전히 한국인으로 이름표를 부착하지 못하는 외로운 변방의 삶이자 이방인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절망의 노래다. 김유송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설란과 설찬 엄마가 쓰던 화장대 앞에서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마치 한국사회에서 광대가 된 듯 붉은 원탁 밥상에 올라 볼레로 음악에 맞춰 여전히 혼혈혈류가 날지 못하는 혈전(血栓)된 사회를 향해 강렬한 춤으로 저항한다.

마지막 장면의 볼레로 군무는 타자들의 시선의 폭력성과 다문화가족을 바라보는 냉혹한 현실사회의 저항이자 한국인으로 이름표를 부착하고 싶은 욕망의 변주다. 엄마로 등장하는 무희(김규미 분) 가 아브찬 핫산과 설란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들고 다문화 가족 100만 시대에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아이’를 품에 안을 것인가? 라는 사뭇 진지함으로 묻고 있다. ‘니 애비의 블레로’는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가족, 코피노들의 고단한 삶과 정체성의 모순들을 단순한 현실 구조보다는 아라비안나이트의 설화적 이야기를 연결해 단조로운 극적 구조를 탈피하려는 시도는 신선하다. 그러나 반복적인 볼레로 음악의 차용과 과거- 현재로 넘나드는 극중극은 늘어진다. 1장과 마지막 장에서 선곡하고 있는 세 곡(여행을 떠나요, 설란이가 왔다, 거리에서) 도 매우 의외적인 장면으로 활기 있게 몰아가려는 연출력에서는 생기가 돋보였으나 강조가 길어 삶의 흐름이 깨진다. 연극적인 의외성은 반복적일 때 지루해 질수 있다. 마지막 장면도 김광석의 ‘거리에서’를 설찬이 기타로 연주해 라이브로 부르는 장면으로 다문화가족들의 현재성들을 투영하려는 시도는 좋으나 길어지면서 마지막 볼레로 군무까지 장면이 늘어난 인상을 주고 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무희와 코피노 아버지가 방의 현실 공간에서 만나 극중극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오히려 가공적 설화의 이야기의 환상을 깨트리고 있다.

내면으로 숨겨진 저항이 더 꿈틀댄다.

아버지 역을 맡은 임유송은 극이 종점을 향할 때 까지 에너지 있는 연기로 극의 중심을 잡았고, 설란역의 박재선도 역할에 집중된 자세를 보이며를 끌고 갔다. 그러나 내면으로 숨겨진 단단한 저항성이 배우 외면으로 채워져야 한다. 이번 작품이 관심을 받은 것은 30대 초반의 단원들의 패기와 열정이다. 앞으로 연극저항 집단 백치들은 이 패기와 열정을 넘어 연극적인 노련함과 신선한 예술성이 극단에 토양을 이룰 때 대구를 넘어 전국적인 극단이 될 수 있다 충분한 토양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항로로 정하고 있는 ‘연극으로 저항’은 연극 항해에서 저항적 의식은 꿈틀대고 표현양식은 비대하고, 빈약한 재료로 둘러싸인 저항은 연극을 타격하는 방향성이 모호해 질뿐이다. 백치들의 항해는 가능성을 열고 있다.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공연예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