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워도 너무 더운 올 여름. 더위에 허덕이다보니 불현듯 ‘추운’ 영화 생각이 났다. 배경이 겨울 혹은 추위인 영화를 보면서 더위를 식혀보면 어떨까 하는 어린아이 같은 발상. 하지만 그런대로 효과는 있었다. 겨울과 눈이 배경인 영화를 생각하면서 잠시나마 더위를 잊을 수 있었으니까.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가 ‘비우(悲雨, Mayerling, 1968)’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뮤지컬 ‘황태자 루돌프’로 알려진 19세기 오스트리아 황태자 루돌프의 비련(悲戀) 이야기. 그런데 ‘겨울 영화’라면서 난데없이 ‘슬픈 비’라니. 하지만 테렌스 영이 감독하고 오마 샤리프, 카트린 드뇌브가 주연한 이 영화는 제목이 ‘비우’ 아닌 ‘비설(悲雪)’이라야 맞다. 배경이 눈 덮인 겨울 산야였기 때문. 실제로 당시 이 영화의 신문광고에 실린 카피는 이랬다. ‘눈보라를 타고 바람이 전해준 꿈같은 사랑… 이제는 돌아갈 길 없는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
그래서 영화를 보던 당시 당연히 ‘비설’이어야 할 영화를 왜 ‘비우’라고 했는지 못내 궁금했다. 그러다 나중에 그 이유를 추리해냈다. 원인은 이 영화가 국내 개봉하기 직전 ‘비설(1969)’이라는 영화가 국내에서 이미 상영됐기 때문이었다. ‘비설’은 당시 ‘제2의 제임스 딘’으로 인기 절정이던 청춘스타 크리스토퍼 존스와 ‘엘비라 마디간’으로 명성을 날린 스웨덴 여배우 피아 데게르마르크를 기용한 이탈리아 영화였다. 레나토 카스텔라노라는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영어 제명이 ‘Brief Season’이었고, 눈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음에도 당시 국내 영화수입업자들은 ‘비설’이란 제목을 붙였다(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랬으니 정작 눈이 배경인 원제 ‘마이얼링(루돌프 황태자의 사냥용 별장 이름)’을 ‘비우’로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게다.
어쨌거나 이루지 못할 사랑을 비관해 연인과 동반 자살한 루돌프 황태자의 실화는 원래 1936년에 아나톨 리트박 감독이 샤를르 부아이에와 다니엘 다류를 써서 이미 만들었지만 68년에 리메이크된 테렌스 영판은 화려한 유럽 왕궁의 세트와 의상에 기가 막힌 눈 풍경, 거기에 드뇌브와 루돌프 황태자의 모친 엘리자베스 황후로 나온 에바 가드너, 두 여배우의 아름다움까지 더해 당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비우’의 연상작용으로 역시 오마 샤리프가 주연하고 겨울풍경이 압권인 ‘닥터 지바고(1965)’가 연이어 머리에 떠올랐다. 러시아 공산혁명시기를 배경으로 한 데이비드 린 감독의 이 고전 명작은 올스타 캐스트가 출연한 다양한 인간군상과 격동기의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인간 드라마로 걸작의 반열에 올라섰지만 마치 겨울왕국을 연상케 하는 러시아의 대설원(大雪原) 등 겨울풍경을 묘사한 배경도 장관이었다. 특히 달리는 열차의 화물칸 문을 안에서 열자 바깥쪽에 얼음이 뿌연 유리문처럼 얼어붙어있던 장면은 지금도 머릿속에 뚜렷이 남아있다. 이런 영화 배경은 그러나 의외로 대부분 스페인에서 촬영됐다. 일부는 핀란드와 캐나다에서 찍었지만.
스페인 얘기를 하다 보니 또 다른 연상작용으로 유니크한 스파게티 웨스턴 ‘Il Grande Silenzio(1968)’가 생각났다. 세르지오 코르부치가 연출하고 장 루이 트랑티냥과 클라우스 킨스키가 주연한 이 이탈리아제 서부극이 왜 유니크한가. 거의 모든 스파게티 웨스턴이 덥고 건조한 황무지가 배경이어서 스페인의 사막지대에서 촬영됐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눈 덮인 유타주가 배경으로 설정돼 있어 스페인 아닌 이탈리아의 눈 쌓인 산지에서 촬영된 데다 영화 내내 등장인물들이 눈 속에서 추위에 떪으로써 관객들까지 춥게 만든 대단히 이례적인 스파게티 웨스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가 배경인 ‘닥터 지바고’에서 또 다른 연상의 가지가 뻗어나간 게 소련-일본 합작영화인 ‘데르수 우잘라(1975)’였다. 한때 슬럼프에 빠졌던 일본의 거장 쿠로자와 아키라의 재기작인 이 영화는 배경이 시베리아의 황량한 숲과 산이다. 영화에는 4계가 다 담겨있지만 특히 광활한 시베리아의 황량함과 어우러진 겨울 풍경은 단연 눈길을 끈다. 그중에서도 데르수 우잘라와 러시아군 장교 둘이서 매서운 눈보라 몰아치는 광야에서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바람막이를 만들어 밤을 새는 시퀀스의 그 추운 질감이라니. 배경을 절묘하게 잡아내는 쿠로자와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장면이다.
이밖에도 ‘추운’ 영화들은 많다. 아주 옛날 것으로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시대(The Gold Rush, 1925)’가 있다. 알래스카의 골드 러시를 배경으로 한 이 무성 코미디영화는 배경이 알래스카답게 휘몰아치는 눈보라도 거의 주연급이다. 또 겨울과 눈이 배경이긴 하나 추운 영화라기보다는 따뜻한 영화라고 해야 할 영화들도 있다. 성탄절이면 으레 생각나는 영화들.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 프랭크 카프라 감독, 1946)’ ‘34번가의 기적(Miracle on 34th Street, 조지 시튼 감독, 1947)’ ‘화이트 크리스마스(마이클 커티스 감독, 1954)’. 새삼스레 줄거리 소개가 필요 없는 것들이다.
좀 더 요즘 영화로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 피터 켈섬 감독, 2001)’도 있다. ‘사랑은 운명’이라고 믿는 두 남녀의 우여곡절 만남과 헤어짐을 그린, 그러나 결국은 날아드는 눈송이 같은 해피엔딩을 맞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배경이 되는 크리스마스 시즌의 뉴욕과 센트럴 파크의 모습은 그러나 겨울이지만 춥지 않다. 존 큐색, 케이트 베킨세일 주연.
반면 이처럼 ‘따뜻한 겨울영화’와는 딴판으로 영화의 배경인 추위가 심신의 추위, 오싹함으로 연결되는 영화들도 있다. 대표적인 게 ‘샤이닝(1980)’이다. 명장 스탠리 큐브릭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영화. 호러소설의 대가 스티븐 킹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것들 중에서는 최상급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아울러 겨울 동안 고립되는 콜로라도 산중의 외딴 호텔 관리인 일자리를 얻어 가족과 함께 호텔에 왔다가 악령에 홀려 아내와 자식을 죽이려 광분하는 주연 잭 니콜슨의 광기어린 연기도 격찬을 받았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니콜슨이 자식을 잡아 죽이려 헤매는 눈 덮인 호텔의 미로 정원은 그야말로 섬뜩한 추위를 자아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샤이닝’만큼 오싹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단히 으스스한 범죄 코미디도 있다. 유괴, 살인 등을 다룬 조엘과 이선 코언 형제 감독작 ‘파고(Fargo, 1996)’. 이 영화는 웃기게도 시작할 때 ‘실화’라고 해놓고 끝날 때는 ‘모든 등장인물은 허구’라는 자막이 나온다. 그 자체가 코미디다. 다만 배경이 되는 미네소타의 겨울 풍경은 러시아 못지않게 장관이고 눈 속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범죄행위는 소름이 돋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SF적인 무서움을 추위로 포장한 영화들도 있다. ‘괴물(The Thing, 존 카펜터 감독, 1982)’과 ‘투모로(The Day After Tomorrow, 롤랜드 에머릭 감독, 2004)’다. ‘괴물’은 황금기 SF 소설의 선구자 존 캠벨의 고전을 영화화한 것으로 외계에서 온 생명체가 수만년 동안 남극대륙의 얼음 속에 묻혀 있다가 깨어나 혹독한 추위 속에서 지구인들과 한판 승부를 벌인다는 얘기다. 기생성(寄生性)인 이 외계인은 숙주의 DNA에 맞춰 자유자재로 스스로의 신체를 변형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 남극기지에 고립된 지구인들 사이에 누가 외계인인지 알 수 없는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영화는 그 같은 줄거리 외에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특수분장 및 촬영 등으로 ‘영화사상 가장 무서운 영화’ 중의 하나로 꼽히면서 컬트 클래식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리고 ‘투모로’는 원제가 ‘모레’인데 한국어 제목은 ‘내일’로 둔갑했다. 기상이변으로 지구에 빙하기가 새롭게 도래한다는 재난영화다. 데니스 퀘이드, 제이크 질렌할 등 배우들보다도 얼음과 추위가 실질적인 주연이고 스토리나 구성 등도 별 의미가 없다. 영화를 보면서 추위를 느끼면 그만이다. 그런 의미에서 더위를 잊게 해주기에는 딱인 영화다.
더위가 가시려면 아직 많이 남은 이즈음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늦은 피서를 해보는 건 어떨지.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
[김상온의 영화이야기]<84>‘추운’ 영화들
입력 2016-08-22 15: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