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터널’은 결국 배우 하정우(본명 김성훈·38)의 연기로 점철된다. 엄청난 감정의 진폭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한없이 가벼웠다가도 한순간 침잠하는 식이다. 어떤 이야기든 사실적으로 표현해내는 것 또한 그의 능력이다. 이보다 더 완벽한 캐스팅이 있었을까 싶다.
‘터널’에서 하정우는 아내(배두나)와 딸을 둔 평범한 가장 정수 역을 맡았다. 딸 생일날 케이크를 사들고 귀가하는 길에 갑작스레 터널 붕괴 사고를 당한다. 무너진 터널 안에 갇힌 정수는 구조될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애쓴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그의 분투가 애처롭다.
실제 하정우의 유머감이 곁들여져 ‘웃픈’ 상황을 만들어냈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하정우는 “캐릭터를 가볍게 가져가야 관객이 끝까지 이 영화를 잘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캐스트 어웨이’(2000) 같은 생존기 영화처럼 (주인공에게) 편안함이 느껴져야겠다는 판단이 섰다”고 설명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그 안에서 여유로울 수 없겠죠. 하지만 이건 극영화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영화적인 판타지가 허용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캐릭터도 낙차를 크게 표현했어요. 코미디로 릴렉스 시키고, 다시 긴장된 순간을 맞았을 때 감정을 끌어올려주는 거죠. 어디까지나 영화적인 장치였어요.”
원맨쇼 연기는 ‘더 테러 라이브’(2013)에서의 경험이 적잖은 도움이 됐다. 그때 경험을 살려 김성훈 감독에게 촬영방식을 제안하기도 했다. 장면 장면을 끊어 찍기보다 주변에 카메라 여러 대를 설치해놓고 롱 테이크로 이어가는 방식이었다. 주변의 방해를 최소화하고 온전히 홀로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일각에서는 ‘터널’이 ‘더 테러 라이브’와 비슷한 류의 작품일 거라는 선입견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하정우는 “전혀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초반 패턴은 비슷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설정이 달라지기 때문에 전작에 대한 잔상은 없었다”고 말했다.
‘터널’에는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구조를 포기하자고 종용하는 이도, 피해자 가족을 원망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덮어놓고 그들을 비난하긴 어렵다. 각자의 사정과 입장을 고려하면 이해가 된다. 하정우도 공감했다. “나이가 들수록 타인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는 것 같다”는 게 그의 말이다.
“(오)달수 형이 요즘 눈물이 많아졌어요. (배우로 살면서) 작품에서나 일상에서 다양한 사건과 사람들을 만나 이해심을 갖다 보니 덩달아 눈물도 많아지는 것 같아요. 그런 이해심의 찌꺼기가 눈물이 아닌가 싶어요. 저도 요즘 놀라는 게, 웃을 때도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냥 저만의 생각이에요(웃음).”
데뷔 때와 비교해 또 달라진 건, 마음가짐이다. 데뷔작 ‘마들렌’(2002) 이후 14년 동안 무려 40여편의 작품에 출연한 그는 “그동안은 나만을 위해서, 내 성취감을 위해서, 내 삶을 위해서 달려왔다”며 “이제는 배우 하정우 삶의 지분이 100%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 얘기했다.
“관객이 될 수도, 팬이 될 수도 있겠죠. 어쨌든 제 지분이 점점 나뉘는 것 같아요. ‘아가씨’ ‘암살’ 때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내 자신을 위해 작품을 선택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보탬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부쩍 많이 해요. 작품은 올곧이 감독의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관객의 것이잖아요. 관객이 즐겨야 그 작품이 가치 있는 거니까요.”
하정우는 벌써 차기작 ‘신과 함께’ 촬영에 한창이다. 한여름 날씨에 긴팔·긴바지·롱재킷까지 입어야 한다며 투덜댔다. 그러면서도 표정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육체적인 힘듦이나 창작의 고통은 늘 익숙한 것”이라면서.
그가 지치지 않고 다작(多作)을 이어가는 원동력은 뭘까. “아직 미혼이라 그런다”는 유쾌한 농담, 그리고 진솔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얼마 전 맷 데이먼의 인터뷰를 봤는데 앞으로 1년을 쉬겠다고 하더라고요. ‘굿 윌 헌팅’때부터 엄청나게 달려온 배우인데 의아했죠. 조금이라도 젊을 때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추억을 쌓고 싶다는 거였어요. 저도 그렇게 가치있는 일이 생기면 쉴 생각은 있어요. 하지만 지금 제게 가장 가치있는 건 영화를 찍는 일이에요. 이런 마음이 계속 작품을 하고 싶게 만드는 동력인 것 같아요.”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