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있는 교회로 데려다 주세요.”

입력 2016-08-05 14:51 수정 2016-08-05 16:12
'인분 나르는 정치범들'. 일본의 후지TV가 27일 공개한 북한 함남 요덕정치범수용소 모습으로, 정치범들이 경비대와 보위부원들의 주택가를 돌며 인분을 퍼내, 나르는 모습이다. 후지TV 제공

김영순 북한민주화위원회 여성위원장 인터뷰


최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제재 대상 리스트에 포함하는 '북한 인권 보고서'를 연방의회에 제출한 미국 정부가 '북한 정치범 수용소 보고서' '북한 인권 개선 전략 보고서' 등을 잇달아 내 대북 인권 압박의 강도를 계속 높이고 있다.

이처럼 미국의 숨통조이기 전략은 이제까지 밝혀진 탈북민들의 증언과 분석을 통해 이뤄졌을 것이다. 그 3만이 넘는 탈북민들 가운데서 아주 특이한 경력을 가진 여성이 있다. 북한에서 상위 1% 엘리트의 삶을 살다가 한순간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배가고파 쥐를 잡아먹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김영순(79·사진) 북한민주화위원회 여성위원장이다.

탈북 이후 2004년부터 24회, 12개 국가를 순방하며 미국 청문회, 하버드 대학, 토론토 법대에서 북한의 실태에 대한 강연을 했고 78차 국제 펜(pen) 대회에서도 북한의 실상을 알렸다. 나이에 순응하지 않고 건강한 몸으로 왕성한 사회활동을 벌이는 그를 5일 서울 지하철 방화역 근처 그의 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북한에서 어떻게 상위 1%의 삶을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저의 오빠와 부모님은 원래 빈농이셨습니다. 경상북도 안동출신이에요. 오빠는 6.25전쟁 당시에 김일성과 함께 서울을 점령한 장군이었습니다. 지금은 개국공신이죠. 3544 105 탱크 사단이 서울을 3일 만에 점령한 겁니다. 그래서 전 평양에서 당원으로 활동했고, 평양예술대학교 1기 졸업생으로 무용을 전공했습니다. 저의 친한 동기가 김정일의 3번째 부인 성혜림이었어요. 혜림인 연극영화전공을 했고 당시에 월북 조선작가동맹위원장 이기영의 아들 이평과 결혼생활도 했었습니다. 둘 사이에 딸도 있습니다. 이평과 김정일은 서로 친한 친구여서 김정일이 이평의 집에 매일 놀러가 성혜림도 만났다고 합니다. 저는 평양 최신식 아파트에서 호위호식하며 살았어요. 이름도 원래는 김영자인데 일본식 이름이라고 북한당국에서 개명하라 지시를 받아 김영순으로 살고있죠. 그 때 당시만 해도 ‘자유’가 무엇인지 몰랐어요.”

-그럼 요덕수용소엔 어떻게 들어가신 건가요?

“요덕수용소는 정치범들만 들어가는 곳이에요. 가장 무거운 죄를 짓고 가장 끔직한 벌을 받는 곳입니다. 하지만 그 곳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모릅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죄를 얘기해 주지도 않고, 아무도 모르게 저와 저의 가족들을 개처럼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성혜림이 그의 집으로 찾아와 “영자야, 나 5호댁(김정일의 직계가족만 사는 곳)에 가”라고 말한 후 그는 요독으로 끌려갔다고 했다.
89년도에 반탐국장(보위부 2번째 높은 사람)이 그를 보위부로 불러 “놀라지 마십시오. 잠깐 알아볼 것이 있어 불렀습니다. 성혜림은 김정일의 처도 아니며, 아들도 낳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새빨간 유언비어입니다. 다시한번 어디서 들었거나 유발할 때는 용서치 않겠습니다. 가보십시오.” 그 말을 듣고 그는 깨달았다고 했다. ‘성혜림 때문에 요덕에 갔구나’

-요덕수용소의 삶을 자세히 얘기해주세요.

그는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이야기”라며 얼굴빛이 어둡게 변해갔다. “70년 10월 1일부터 79년 가을까지 9년 동안 있었습니다. 장진에 있는 증훙 강산 금광에 배치되어 노동을 했어요. 성광장, 하부조구에서 일을 했는데 산꼭대기에서 광석을 굴려 떨어트리면 그 밑에 자동차에 광석을 싣는 일과 광차에다가 금돌을 싣고 밀어오는 일을 했죠. 3교대로 일을 했어요. 말도 못하게 힘들었습니다. 또 하루에 풀을 800키로 베는 일을 했어요. 풀숲에서 풀을 베는 순간 굴러 떨어지고 다시 기어 올라오고..... 솔직히 하루에 누가 800kg을 벱니까? 사람은 못해요. 그건 쉬지 말고 일만 하라는 소리에요. 한국 사람들은 이해 못 할 겁니다.” 그곳에서의 삶은 일본 2차 대전 집단 수용소에서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었다고 한 것 보다 더 끔찍한 곳이라며 학을 땠다.

요덕수용소는 혁명화 구역이다. 수용소엔 3·40명의 정치범들이 있다. 그들 대부분 아프리카 토종 패라그라 병에 걸린다. 눈알이 튀어나오며 피부가 철색으로 쩍쩍 갈라지고 피가 나오는 병인데, 영양이 부족해 일어나는 병이다. 통옥수수를 먹으며 소금을 씹어 먹었다고 한다. 그래도 배가고파 뱀(살모사)을 생으로 잡아먹어서 전신에 기생충이 기어다니고 고름이 차 있는 혹이 돋아 죽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했다. “날아다니는거 기어다니는거 다 먹고 이름 모를 풀까지 뜯어 먹었어요. 개미면 개미 지렁이면 지렁이.... 안 먹은 것이 없어요.”

-가족들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거기는 다 죽어요. 늙은이는 다 죽고 어머니 아버지도 1년 만에 굶어 죽고, 애들도 3년 만에 다 죽고.... 돌, 4살, 9살, 어머니, 아버지 다 죽었어요. 남편은 돌아올 수 없는 수용소에 끌려가 아직까지 소식을 모릅니다.” 함께 탈북한 호흡기 장애 2급 판정을 받은 51살의 큰 아들만이 살아남았다고 했다.

-살아남으신 아드님의 대해 말씀해 주세요.

그는 펄쩍뛰며 “안돼요. 몰라요!”를 외쳤다. 자식을 지키려는 어미 새처럼 날카로웠다. 그렇다면 왜 호흡기 장애 2급 판정을 받게 됐는지만 말해달라고 하자, 그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했다. “아들은 38살에 한국에 왔어요. 지금은 51살이고 미션홈(Mission Home)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두 번 북송된 경험이 있어요. 돈 6천원을 주고 다시 빼내오기도 했습니다. 아들은 몸이 매우 아파서 바깥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기관지 출혈을 일으켜요. 피를 쏟아내면 2키로 정도 쏟아냅니다. 출혈을 일으키는 이유는 고문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몸무게가 40키로도 안돼요. 일 년에 7번 피를 쏟았습니다. 한국에서 탈북민 22명이 기관지 수술했는데 2명은 죽었어요. 고문할 당시 혈관에 쇠를 다 박아 넣었다고 합니다.”

-교회를 다니신다고 들었습니다.

“1950년도 해방 후, 북한에서도 교회가 임시위원회로 활동을 했었어요. 46년도 제가 9살 때, 엄마 따라서 교회를 다닌 기억이 있습니다. 성경책이 세로 되어있었어요. 엄마가 항상 ‘사람은 하늘을 비꼬면 안 된다. 나쁘게 생각하면 안 된다. 항상 정확하게 살아야한다’ 하셨습니다.”

그는 탈북시도 후 중국서 교회를 찾아 새벽기도를 다녔다고 한다. 2003년 대한민국 행 비행기를 타서도 하나님께 ‘대한민국으로 무사히 가서 제 사명감을 다할 수 있도록 해달라’ 기도 드렸다고 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을 얻고 3일 만에 강철수 목사님이 계신 사랑의교회를 다니게 됐습니다. 지금은 사랑의교회 집사로 있어요.”

-현재 살고 계신 곳이 강서구인데 어떻게 서초구에 있는 교회를 다니시게 됐나요?

“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있어요. ‘믿음 소망 사랑 그중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래서 서울 지리도 모르는 제가 택시를 타고 기사님에게 ‘교회 이름 중에 사랑이 들어간 교회로 데려다 주십시오.’ 했더니 서초에 있는 사랑의 교회로 데려다 주셨어요. 교회에 들어가서 담임목사를 만나자 생각 했는데 목사는 한 교회에 한 분만 계신게 아니더라구요.(웃음) 너무 많아서 당황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도 교회를 매주 나가시나요?

“매주 다닙니다. 제가 교회 집사를 한지 벌써 10년이 됐어요. 2004년 3월 20일부터 교횔 다녔거든요. 처음 물세례 받을 때는 영국에 가게 되어 받지 못했는데 돌아와서 6개월 후 오종용 목사님이 물세례를 해주셨습니다. 그 때 많이 울었어요.” 그 때를 떠올리는 그의 얼굴에 자랑스러움과 함께 행복한 웃음이 걸렸다.

자신은 정의를 기준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했다. “북한은 지옥이고 대한민국을 천국으로 생각해요. 지금 전 천국 백성으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사랑으로 정의를 내립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전 지금 부활 된 거나 같아요. 저는 천국 백성입니다.”

-왜 천국을 대한민국으로 생각하시나요?

“한국에서 13년 살아도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북한은 반장이 ‘동원나오라’며 매일같이 문을 두드립니다. 한국은 한 달 스케줄을 다 제 손으로 제 시간을 사용할 수 있죠.”

주일 예배를 드리고 집에서 아침 저녁 자고 일어날 때,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를 숨 쉬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북한이 핵과 동시에 정치범 수용소를 해체 할 때까지 제가 북한의 실태를 낱낱이 밝힐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으로 평화로운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복음에 힘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할말은?

그는 대한민국의 언론에게 할 말이 있다고 단호히 얘기했다. 최근 북한 종업원 집단탈북사건도 꺼내들었다. “탈북자들이 집단 탈출한 것을 왜 법정에 세워야 하며, 언론이 왜 발표를 해야 합니까? 비밀에 부치면 안 됩니까?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들에게 법정에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언론들이 무슨 이야기를 써내겠습니까. 제가 탈북한 후 미국에 12번 갔을 때, ‘김정일을 위하여!’ 하면서 축배를 드는 사람도 봤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안 잡고 왜 엄한 사람 꼬투리 잡는지 모르겠습니다. 평화 통일을 이루려면, 북한의 삶에 대한 나쁜 보도는 하지 말아야합니다. 북한에 대한 인식이 점점 나빠지는데 평화통일이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는 속상한 마음을 강하게 내비치며, 국민일보 미션라이프에서도 왜곡된 보도는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현재 대한민국이 낳은 세계최고의 무용가 최승희의 제자로 춤의 일부를 전수받아 학생들에게 최승희의 춤을 가르치며 일생을 보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춤사위가 선생님의 몸짓을 그대로 표현하지 못해 안타깝지만 선생님의 춤을 어린 학생들에게 꼭 전수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열정 넘치는 ‘탈북한 영자씨’가 아닐까 싶다.

김도영 대학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