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를 다녀왔다. 마침 묵었던 호텔은 ‘노스탤지어’를 주제로 지어진 곳이었는데 호사스럽고 우아한 옛 유럽의 정취를 고스란히 재현한 모습이었다. 오래 돼 보이는 이탈리아식 건물에 윤이 나는 나무 마룻바닥이 깔려있고, 고급스러운 가죽소파가 놓인 크지 않은 로비에는 벽난로 양옆으로 커다란 서가에 책들이 꽉 차 있었다. 요즘 세상에 책장과 책으로 장식된 호텔 로비라니. 마치 옛날 유럽 귀족 저택의 서재 같은 인상이었다. 그 당시에 살아본 것은 물론 아니고, 소설이나 영화에서 본 것 말고는 그런 곳에 가본 적도 없지만 희한하게도 어떤 그리움 같은 노스탤지어가 솟아올랐다.
노스탤지어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가장 간단하게는 ‘고향이나 지난날이 그리워지는 마음’이지만 좀 더 복잡하게는 ‘과거 어느 한때의 회한스러운 추억에 대한 감상적 열망, 또는 지난날에 대한 감상적 상상이나 추억 되씹기’, ‘멀어진 사람이나 더 이상 소유하고 있지 않은 과거의 무엇인가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한 우울한 마음 상태’를 말한다.
예의 호텔처럼 이런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장소나 물건이 있듯이 노스탤지어를 이끌어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 바로 영화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을 떠나는 것. 우리를 노스탤지어로 이끄는 영화들은 많다. 그중 몇 개만 보자.
먼저 아주 옛날 것으로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1933)’이 있다. 루이자 메이 올코트의 걸작소설을 원작으로 몇 번씩 영화화된 고전이다. 33년판은 조지 큐커가 감독하고 캐서린 헵번이 주연을 맡았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옛날얘기지만 이야기가 담고 있는 흔들리지 않는 가족 간의 사랑, 가족이 같이 있는데서 비롯되는 행복, 그리고 이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이웃집 또래 이성(異性)과의 따뜻한 우정 혹은 애정 같은 것들은 관객을 좋았던 옛날의 향수에 젖어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다음은 왕년의 대배우 글로리아 스완슨이 마치 자신의 이야기이기라도 한 듯 멋진 연기를 보여준 ‘선셋대로(Sunset Blouvard, 1950, 빌리 와일더 감독)’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과거에 대한 집착과 노스탤지어에 젖어 사는 왕년의 은막 스타 이야기를 비극적으로 그렸다.
반면 즐거운 뮤지컬도 있다. ‘메리 포핀스(Mary Poppins, 1964, 로버트 스티븐슨 감독)’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세기말 런던을 무대로 못하는 게 없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행복을 가져다주는 보모 이야기. 누구라도 줄리 앤드루스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이 영화의 행복한 아이들이 되고 싶지만 ’이룰 수 없는 노스탤지어‘일 뿐.
‘노스탤지어’라면 연출 또는 출연한 거의 모든 작품이 노스탤지어와 연관돼있다 해도 좋을 만큼 단연 첫손가락에 꼽힐 우디 앨런의 작품이 그 다음이다.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Play It Again, Sam, 1972)’. 앨런을 처음으로 대중에게 각인시킨 것으로 평가되는 이 영화는 앨런이 각본을 쓰고 주연했지만 이례적으로 감독은 맡지 않았다. 허버트 로스 연출. 영화는 시작부터 흑백 화면이 갑자기 등장한다. ‘카사블랑카(1942)’의 마지막 장면이다. 앨런이 이 영화를 보면서 자신과 영화 주인공 릭(험프리 보가트)을 동일시하는 영화 기고가로 나온다. 그의 직업이 말해주듯 영화광인 극중 앨런의 집은 옛 할리우드 황금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온갖 희귀한 영화 포스터와 소품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가 하면 스티븐 킹의 원작소설을 로브 라이너가 영화화한 ‘스탠드 바이 미(Stand By Me, 1986)’는 모험과 호기심으로 가득 찼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요절한 리버 피닉스의 어릴 적 모습이 신선한 영화다. 80년대에 시작돼 2000년대까지 계속된 4편의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는 노스탤지어 영화다. 특히 첫 작품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Raiders of the Lost Ark, 1981)’는 서부극에서부터 2차대전 전쟁물, 고대 유물 발굴 및 유적 답사 이야기, 괴기영화까지 거의 모든 할리우드 황금기 영화장르를 망라한 종합선물세트로 관객들의 향수를 무한 자극했다.
90년대로 들어오면 올리버 스톤의 ‘더 도어스(The Doors, 1991)’와 로버트 제메키스의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 1994)’가 노스탤지어 영화를 대표한다. 60년대의 스타였던 록밴드 도어스의 리드 싱어 짐 모리슨(발 킬머)의 일대기를 그린 ‘더 도어스’는 60년대를 풍미한 히피문화와 반문화를 상기시켜주고 ‘포레스트 검프’는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미국의 정치·사회상을 고스란히 재연해 특히 그 역사를 살아온 베이비 부머들의 노스탤지어에 강하게 어필했다. 그래서 역시 베이비 부머인 빌리 조엘이 부른 역사노래 ‘우리가 불지르지 않았어(We Didn’t Start the Fire)’의 영화판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000년대가 돼서도 노스탤지어 영화는 줄을 잇는다. 먼저 조니 뎁이 피터 팬의 원작자 J M 배리로 나온 ‘네버랜드를 찾아서(Finding Neverland , 2004, 마크 포스터 감독)’. 배리가 런던의 공원에서 네 자녀를 거느린 아름다운 미망인(케이트 윈슬렛)을 만나 피터 팬 창작의 모티브를 얻으면서 미망인과 우아한 관계를 엮어가는 이야기인 이 영화는 요즘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남녀 간의 진지하고 따뜻하고 깊숙한 플라토닉한 관계를 묘사하고 있어 순수했던 시절을 향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노스탤지어의 제왕’ 우디 앨런도 가만있지 않는다. 2010년대로 접어들자마자 ‘미드나이트 인 파리(Midnight in Paris, 2011)’를 내놓았다. 앨런 각본, 감독(출연은 하지 않았다). 파리 여행 중인 미국의 영화 각본가가 타임 슬립을 해 밤마다 1920년대의 파리로 돌아가 1차대전 후 문학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거장들과 만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거트루드 스타인, 그리고 장 콕토까지. 문학과 ‘좋았던 시절’의 파리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향연인 영화다.
프랑스도 이에 대응하듯 ‘디 아티스트(The Artist, 2011)’를 만들었다. 요즘 영화로는 매우 드물게 흑백 무성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미드나이트 인 파리’와는 거꾸로 프랑스인이 그린 20년대의 할리우드가 무대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전이하던 시절의 할리우드를 묘사한 이 영화는 프랑스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고, 역시 프랑스 배우 최초의 남우주연상(장 뒤자르댕)을 받았으며 최우수 감독상(미셀 아자나비시우스)도 차지했다. 이는 어찌 보면 아카데미 심사위원들도 그만큼 과거 할리우드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빠져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최근 영화 중 노스탤지어의 정점을 찍은 것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The Grand Budapest hotel, 2014, 웨스 앤더슨 감독)’이다. 유럽의 가상국가를 배경으로 파스텔톤의 색조와 바로크식 인테리어, 벽에 걸린 미술작품들을 포함해 우아한 소품 등 영화로웠던 옛 유럽의 향취를 그대로 간직한, 그러나 이제는 조금씩 쇠락해가는 화려한 호텔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이 영화는 앤더슨 감독이 스테판 츠바이크의 글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고 한다. 앤더슨 감독은 이 영화를 찍으면서 출연진에게 옛날 감각을 살릴 수 있도록 에른스트 루비치, 루벤 마물리언, 프랭크 보제이지 등 이름만으로도 노스탤지어를 자아내는 옛날 할리우드 감독들의 영화를 보도록 했다는 후문이다. 그 정도로 공을 들였으니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이 가보지 못한 우아한 시공간에 대한 갈망, 노스탤지어야 말해 무엇하랴.
사족. 내가 들렀던 호텔도 규모는 작고 인테리어도 덜 사치스러웠지만 어딘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옛 유럽의 격조와 우아함을 그대로 느끼게 하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리틀 부다페스트 호텔’이라고나 할까. 호텔 이름 역시 고풍스럽게도 넬슨제독의 연인이었던 레이디 해밀턴에서 따왔다는 ‘해밀턴’이었다.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
[김상온의 영화 이야기] <81>노스탤지어 영화
입력 2016-08-01 15: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