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생활이 익숙해질 즈음, 형은 기자 질을 때려 치고 로스쿨에 갔다. 같은 흙수저로서 ‘자’자에서 ‘사’자로 변신한 형을 축하해줬다. 15년 전 짜파게티 한 젓가락이라도 더 먹으려고 싸우던 우리는 두 아이의 아빠도 됐다. 가끔 만나 쪽방 시절을 회상하며 이제는 좀 살만 하다며 웃으며 살았는데 인영이가 아팠다. 백혈병 같다는 말을 처음 듣고 아내 앞에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혼자 울면서 전화를 건 사람이 형이었다. 이후 형은 서초동 사무실이 가깝다며 수시로 병원을 들렸다. “길게 갈수록 결국은 너 혼자 담당할 몫이니 마음 독하게 먹으라”며 ‘인생 독고다이론’을 고수하는 형다운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어느 날은 외래 치료를 끝내고 터미널을 가려는데 비가 왔다. 가까운 거리라 택시를 타면 기사의 짜증을 듣기 싫어 고민하다 형한테 전화를 걸었다. 제네시스로 인영이를 태우고 터미널에 가는 10분 동안 혹 다시 짜파게티를 같이 먹을 날이 있으면 마지막 젓가락을 양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제는 김 변호사의 멘트를 넣어 기사를 썼다. 나는 기자고 그는 변호사니 이상할 것도 없는데 나온 활자를 보니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기사에 나온 ‘법무법인 바로법률 김민호 변호사는’ 중간에 (그는 훌륭한 기자였고, 내 좋은 형이다)라고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 변호사는 내일 대전에 재판이 있어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다. 오늘 이 글로 자린고비형 형이 내일 비싸고 맛있는 밥을 사 줄 것이라고 기대마지 않는다.(2016년5월3일)
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