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고] 청년의 목소리에 기성세대의 메아리가 필요하다

입력 2016-07-28 10:15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20대 청년으로 살아가는 일은 매우 고달프다. 최근에‘헬조선’이라는 말은 유행처럼 퍼졌고 ‘수저계급론’의 등장과 함께 우리 사회의 차별과 부조리가 판치는 현실에 자조 섞인 목소리로 뒤덮였다. 이 뿐만이 아니다. ‘3포 세대’를 뛰어넘어 5포, 7포 다포세대라는 말과 함께 대한민국의 청년들에게는 포기할 것도 많아졌다. 청년실업률은 날이 갈수록 최고치를 기록했고 그럼에도 취업 관문을 뚫기 위한 그들의 필살적인 노력에 대한 보답은 ‘비정규직’이라는 벽에 또다시 부딪히고 만다. 그들에게 꿈과 희망이라는 단어는 점점 낯설어졌으며 낭만 따위도 되어주지 못한다. 그저 허상에 불과하다. 가학적 사회다. 대한민국 청년들은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청년기고] 청년의 목소리에 기성세대의 메아리가 필요하다
이지성(24)명지대 디지털미디어학과 3학년


상황이 이렇다 보니 청년들은 어쩌면 기대감소의 시대에 살고 있을 수도 있겠다. 사회 문제에 대한 개선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그냥 현실을 방관하고 순응한다. 무기력해진 청년들은 염세주의와 허무주의의 늪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영국의 극작가인 조지 버나드 쇼는 “청춘을 청춘에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라고 말했다. 아마 이러한 상황에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 하나 챙기기도 버거운 상황에서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것은 사치라는 말보다 우둔함이라는 말이 어울리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20대, 청춘, 젊음이라는 존재적 의미는 여전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단 부딪혀도 실패하고서 다시 재도전할 수 있는, 오직 그 시기에만 존재하는 열정과 패기의 힘찬 에너지가 그 원천이다. 사실 이러한 말은 나 또한 20대로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앞선 말들의 의미는 어른들과 기성세대 관점에서 정의되고 그들이 겪었던 인생을 중심으로만 가치가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의미의 진정성을 부정하진 않는다. 20대라는 시기가 일시적이고 지나면 되돌아올 수 없는 시기임을 충분히 공감하기 때문이다.

요즘 청년들은 자기계발에만 몰두한 나머지 사회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변화 의지가 없다고 하지만 사실 그렇지만도 않다. 인생 최고의 시기에 살고 있지만 최악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대한민국 청년들은 더 이상 순진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사회 구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저항과 사회 변화의 의지는 조금씩 적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움직임은 ‘20대 총선 투표율’에서 나타났다. 20대 총선에서 2030 세대의 투표율은 2012년에 있었던 19대 총선 투표율보다 12%포인트 가량 오른 것으로 집계됐다. 그리고 투표 결과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이변을 만들었다. 선거 전 여당의 득세를 점쳤던 언론과 여론조사기관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청년들은 현 정권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투표로 심판한 것이다. 자신의 1표에 사회 변화를 기대했고 그것을 실천에 임한 것이다. 그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었고 무기력감에서 벗어난 적극적인 사회 개선 의지였다.

그러나 선거 이후 정치권의 모습은 참담했다. 변함없이 우리에게 시련을 줬다. 여당의 반성은 없었고 야당은 기고만장해졌다. 뒤이어 어느 야당의 청년비례대표 의원은 선거 과정에서 비리가 드러났다. 각 당의 청년정책은 유명무실해졌다. 선거 전에 청년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목소리의 진정성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청년들은 또다시 불안과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다시 무기력감이 청년들을 엄습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드러난다. 고통에 신음하던 청년들의 외침에 기성세대는 메아리가 없다. 정치권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을 이끌고 있는 주요 세력인 기성세대는 청년에게 무관심한 것처럼 보인다. 그 어느 때보다 세대 갈등이 극심한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런 말은 세대갈등을 더 부추기는 생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보여줬던,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오로지 자신의 기득권 사수만을 위한 기성세대의 모습을 보면 이러한 생각은 정당하다.

불통의 시대에 살고 있다. 청년의 목소리가 적극적이지 못해 전달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학업과 스펙 쌓기, 취업난의 스트레스에 ‘대2병’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의 지쳐 있는 청년들이다. 그런 상황에서 ‘너희들이 목소리를 더 크게 내! 그러면 이 사회를 바꿀 수 있어!’식의 말이 청년들에게 진정성이 있을까. 라스웰이라는 정치학자는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 과정을 ‘SMCRE 모델’을 통해 설명했다.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Source(송신자)가 Message(내용)을 보내더라도 Receiver(수신자)가 Effect(반응)를 통해 Feedback(피드백)을 하지 않는다면 탄력적인 소통을 할 수 없다. 문제는 Source에 있는 것만이 아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바로 이십 대 우리에게 있다’는 말에 심히 공감한다. 앞서 말했던 우리가 겪고 있는 청춘의 시기는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애써 숨기고 싶지 않다. 청년들이 지금의 현실에서 그러한 자긍심과 자존감마저 잃는다면 스스로 무너지지 않을까 두렵다. 다만 청년들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변화의 방향을 모색해야 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청년들의 이러한 목소리에 기성세대가 응답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청년 문제에 귀 기울이고 예민하게 반응하여 적절한 피드백을 보여주는 원활한 소통을 보여야 한다. 청년들의 목소리에 기성세대의 메아리가 퍼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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