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로로 외우고 포켓몬고 익히고, 고달픈 ‘할마’와 ‘할빠’

입력 2016-07-19 00:03

맞벌이를 하는 아들 부부 대신 손녀를 맡아 키우는 윤모(61·여)씨는 요즘 영어 공부에 한창이다. 지난달 23일부터 경기도 의정부의 한 주민센터를 찾아 기초영어회화 수업을 듣고 있다. ‘스터디 모임’에도 출석 도장을 찍는다. 아들·딸뻘인 수강생들은 윤씨를 왕년의 여배우 이름을 따서 ‘잉그리드’라고 부른다.

영어가 쉬울 리가 없다. 그래도 윤씨는 영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손녀의 한마디 때문이다. 숙제부터 하라고 잔소리 좀 했더니 “할머니는 영어도 못하면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했다. 손녀는 영어 유치원에 다니고 있다.

‘할마’ ‘할빠’는 자기계발 중

손주를 키우는 ‘할마’(엄마 같은 할머니) ‘할빠’(아빠 같은 할아버지)는 ‘자기계발’ 중이다. 영어는 기본이다. 손주가 즐겨보는 애니메이션은 꿰고 있어야 대화가 통한다. 스마트폰은 여전히 복잡하고 어렵기만 한데, 새로 출시된 게임을 하고 싶다는 응석을 받아주는 것도 육아를 맡은 조부모의 몫이다.

서울 송파구에 사는 김모(66·여)씨는 요즘 손자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두려울 정도라고 한다. 증강현실 게임 ‘포켓몬 고’ 열풍 때문이다. “‘포켓몬 고’를 설치해 달라” “○○은 주말에 강원도 가서 포켓몬 잡아 왔다”는 손자의 투정을 받아주는 것도 벅차다. 애니메이션 시청용 태블릿PC 사용법도 겨우 익힌 터였다. 김씨는 18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포켓몬 고’를 검색하는 게 일과가 됐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유모(70)씨는 TV 리모콘을 세 살배기 손자에게 빼앗긴 지 오래다. 아침드라마 대신 ‘뽀로로’를 ‘본방사수’하고 있다. ‘로보카 폴리’ ‘또봇 탐험대’ ‘라바 인 뉴욕’ 등 손자가 즐겨보는 애니메이션을 편성표에서 솎아내는 것도 일이다. 손자의 왕성한 호기심을 받아주려면 등장인물쯤은 외우고 있어야 한다. 유씨는 “예전 같지 않아서 손자와 이야기를 나누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달픈 황혼 육아

맞벌이 부부의 절반가량이 친정이나 시댁 등 조부모에게 자녀 양육을 의탁하고 있다. 국무총리실 산하 육아정책연구소가 2012년 영유아(만 0~5세) 자녀를 둔 2528가구를 대상으로 전국보육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37.1%가 맞벌이 가구인 것으로 조사됐다. 조부모가 양육을 돕는 맞벌이 가구 비율은 영아(만 0~2세)를 둔 경우 54.5%, 유아(만 3~5세)를 둔 가구의 경우 44.9%였다.

항상 ‘업그레이드’를 해야 하는 조부모의 삶은 고달프다. “할머니(할아버지)는 그것도 모르느냐”며 손주가 무심코 던진 말에 상처를 입고, “이왕 하는 거 제대로 좀 봐 달라”는 자식의 말은 괜히 마음에 남는다.

조부모 양육도 엄연한 ‘육아 노동’이다. 하지만 손자·손녀를 보면서 자식들에게 적정한 ‘임금’을 요구하기는 쉽지 않다. 결국 많은 조부모들이 ‘최저임금’ 수준도 받지 못한 채 주 40시간이 넘는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육아정책연구소가 지난해 11월 펴낸 ‘조부모 영유아 손자녀 양육 실태와 지원 방안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황혼 육아를 맡은 조부모들은 주당 42시간을 양육에 쓰고, 월 57만원을 받는 것으로 조사됐다. 시급으로 따지면 최저임금의 절반 수준인 3350원이다. 양육비를 정기적으로 받는 경우도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손주를 돌보느라 골병을 앓는다는 ‘손주병’은 더 이상 신조어도 아니다.

신훈 기자 zorb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