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기로 점찍는 윤종석 작가 선긋기 신작 공개 “주름 통해 사회적 가치와 계급 은유”

입력 2016-07-17 18:15
흐르는 가벼움-호피무늬,나비 257x194 acrylic on canvas 2007


롯데백화점 잠실점 에비뉴엘 아트홀 ‘플리(pli) 개인전

윤종석(46) 작가는 붓 대신 주사기로 그림을 그린다. 물감을 5㏄의 주사기에 넣고 한 점 한 점 점을 찍는다.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수십만 번의 점찍기로 작품이 완성된다. 옷을 접어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인 형상은 권총, 개, 고양이, 아이스크림, 별 등을 그린 것이다. 이를 통해 실제와 환영, 사회적 가치와 계급 같은 걸 은유하고 있다.
입체감이 생길 정도의 농도로 아크릴 물감을 개어서 주사기에 넣은 다음 밀어낼 때 점이 될 수 있게 반복적으로 화면에 찍는 방식이다. 점으로 중첩돼 올려진 이미지들은 회화면서 조각으로 재탄생한다. 그렇게 점으로 완성된 형상은 우리가 매일 입는 옷이면서 또 다른 사물로 변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마술 같으면서도 서정적인 그림이다.
달콤한 인생 Sweet Life 100×200㎝ acrylic on canvas 2010


한남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2000년부터 점찍기 작업을 해온 작가는 2009년 영국 런던 사치갤러리에서 열린 ‘코리안 아이'전에 참가하면서 K팝 아티스트로 이름을 높였다. 그의 작업이 호평 받는 이유는 이색적인 작업 도구로 눈길을 끄는 차원을 넘어 한 점 한 점 찍어내듯 일상 풍경을 한 점 한 점 연결시켜 세상을 풍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옷을 고이 접어 만든 주름들 속에는 옷으로 만들어지는 사회적 가치와 계급이 녹아 있다. 이것은 새로운 메타포(은유)로 다른 형상을 창조한다. 작가에게 점은 무엇일까. 그는 “점이란 내게 있어서 최소 표현의 단위인 동시에 어떤 군더더기도 포함되지 않는 몸뚱이를 지니며 편집증적 제스처의 신체적 결과물”이라고 설명한다.


점묘법의 창시자 프랑스 화가 조르주 쇠라가 그의 주사기 기법을 본다면 어떤 반응일까. 작가는 이쑤시개, 전선피복, 케이크 장식에 쓰는 짤 주머니 등을 시도하다 우연히 찾은 게 주사기였다. 처음엔 물감 방울을 세기도 했지만 셀 수 없을 만큼 무의식적인 반복이 손목을 움직일 정도였다고 한다.
프로야구를 좋아해 TV 경기 중계를 틀어놓고 작업한다는 그의 옷 작업은 대부분 스포츠 의상이다. 버려진 헌옷들을 주워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권총, 강아지, 양, 화분, 수류탄 모양으로 개켜 변신한 일명 ‘접혀진 옷'(2009)으로 나아갔다. 그의 작업은 중국 베이징, 대만, 미국 뉴욕, 홍콩,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 등에서 러브콜을 보내왔다.
그의 작업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개인전이 서울 송파구 롯데백화점 잠실점 에비뉴엘 아트홀에서 24일까지 열린다. “잘 보이지 않는 곳, 마음속 깊이 간직된 것, 마음의 비밀”이라는 의미를 가진 ‘플리(pli·주름)’라는 타이틀로 1997년 첫 개인전 이후 작품부터 최근작까지 회화 및 조각을 선보인다. 작가의 작업실도 재현했다.


이번 전시에는 요즘 새롭게 시도하는 선 작업도 공개했다. 주사기로 점을 찍는 대신 선을 긋는 방법으로 제작한 신작이다. 붓질의 느낌을 살려 회화의 맛을 보여준다. 기법뿐만 아니라 소재의 전환도 함께 시도한다. 물감 선들을 켜켜이 쌓아 두꺼운 층을 만들어 새로운 주름들을 만들어 내고 인물 형상을 완성시켰다.
고행 같은 작업은 그의 성격에서 비롯됐다. “발에 차이는 어느 하나라도 허투루 볼 수가 없다. 한 점 한 점 찍어내듯 세상의 풍경도 한 점 한 점 연결된 일상이라는 것을 안다. 어떠한 것도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설사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맥락이 혼자여서는 설명할 길이 없으니 얽히고설키는 일상의 귀함을 화폭에 그리는 것이다.”
아버지 227X192 acrylic on canvas 2006

작가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다”리고 고백한다. “몇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세월의 흐름 속에 놓쳐 버렸고 삶도 잠시 머물 뿐 남아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아버지, 초등학교 때 어느 날 택시에 실려 병원에 가신 뒤로 어머니의 눈물과 함께 돌아 오셨고 나는 잊고 지내왔다. 던져 놓은 옷에서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가실 때에도 저 옷처럼 일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돌아가셨겠구나. 나는. 그의 삶을 받은 것인데 내가 기억 하지 않으면 아버지는 흘러 간 과거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의 흔적과 나의 잃어버린 기억의 편린(片鱗)을 찾아 가기 위해. 나는 하루 종일 점(點)을 찍는다.”
지난 그때 518X194 acrylic on canvas 2009

이번 전시는 인고의 노력으로 우리 주변의 사물 그리고 인물 내면의 순수하고 신비로운 에너지를 발견하는 작가의 작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일깨우는 기회다. 지금은 고인이 된 아버지를 그린 인물화와 일상 풍경을 선으로 그린 작품이 끊임없이 실험하고 도전하는 작가의 내면과 열정을 엿보게 한다(02-3213-2606).

이광형 문화전문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