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이형훈 러시아 연해주 라즈돌리나 의료선교사

입력 2016-07-14 18:58 수정 2016-07-14 19:09
진찰하는 이형훈 러시아 의료선교사(오른쪽)
[간증]

이름 : 이형훈(여)
소속 : 국제사랑재단, 송정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직위 : 러시아 연해주 라즈돌리나 의료선교사(2008년~현재)
학교 : 서울성서신학교 졸업, 한국방송통신대 중퇴
경기대학교 사회교육원 침구학과 수료
경력 : 1984년에 침구에 입문 무료봉사 시작
대한침구사협회 대의원, 한국침술연합회 홍보위원

저는 경기도 광주시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입구가 있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허약체질로 태어난 저는 늘 병을 달고 살 정도로 몸이 약해서 운동도 못하고, 여행이나 외출을 하면 집에 와서 며칠씩 앓아눕는 생활이 계속되곤 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아는 높은 사람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시골교회 전도사와 광주읍내에 있는 의사가 두 분이었습니다.

아프다보니 학교도 제대로 못가고 교회와 병원을 주로 왔다 갔다 하게 되었고 나도 어른이 되면 저 분들과 같이 되겠다고 서원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서원인지도 몰랐고, 그 두 분의 직업이 합쳐지면 선교사가 된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성장하면서 나이를 먹고 마음 한구석에 늘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그 길을 가지 못했습니다.

계속해서 병마는 저를 괴롭혔고, 학업도, 직업도 지속적으로 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새벽이면 거의 몸이 늘어져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힘들다보니 직장생활을 하기가 매우 힘들다보니 경제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큰집에 있는 사촌 오빠가 침술을 하고 있었는데 경기로 얼굴이 파랗게 질린 아이가 침을 맞고 그 자리에서 얼굴이 제자리도 오는 것을 보고 신기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79년에 친구의 소개로 수지침을 배우게 되었는데 이론 공부를 하다가 그 매력에 푹 빠져서 수지침보다는 일반 체침을 배워야겠다는 생각하고 재야에 유명한 침구사를 찾아서 공부하기 시작했고, 저에게 숨어있던 신유은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간헐적으로 시간 나는 대로 봉사를 하면서 계속해서 한의학 공부를 하게 되었고, 임상을 쌓아가면서 소책자도 내게 되었습니다.

늘 마음에 선교사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조건이나 여건이 맞지 않아서 안타까운 현실만 탓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선교를 나가게 되면 신학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신학을 하게 되었고, 1997년에서 2007년까지 대수술을 일곱 번이나 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2005년 6월 남부중앙교회 청년부 단기선교로 러시아에 선교하러 가는데 그 교회에 있는 친구가 저를 소개해서 의료선교로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국내에서는 오랫동안 의료봉사를 하고 있었지만 해외는 처음이라 망설였지만, 외국인 체질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로로 출발하게 되었고, 먹을 것과 잠자리가 익숙하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서 환자를 치료했습니다. 처음에는 현지 선교사님이나 교회 쪽에서도 저희 의료
사역 팀에는 관심이 없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진료 중 7년 동안 귀가 안 들리던 여자 분이 귀가 들리면서 선교사님은 여러 곳에 전화를 걸어 실력 있는 의사가 왔다고 홍보하기 시작했고, 어떤 남자 분은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된 사람이었는데 진료소가 이동하는 대로 동행하면서 침을 맞았습니다. 나중에 통역을 통해서 그 분이 하는 말이 침이 너무 아파서 처음에 막말을 했는데 감각이 돌아오면서 감사함으로 바꿨다고 감사의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미안하다고 마비된 환자는 강자극을 하지 않으면 마비가 풀리지 않아서 그랬으니까 이해하시라고. 또한 밤이면 7도까지 내려가고, 낮에는 29도까지 올라가서 환자를 진료하느냐고 땀에 흠뻑 젖어 찬물에 샤워를 하고 많은 수의 환자들이 몰리다보니 그만 탈진해서 물 한모금도 넘기지 못하고 고열과 기침이 계속되어 금방이라도 천국을 가야되는 상황이었고, 하바로브스크 여행도 포기해야 하는 정도로 지쳐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힘들었지만 참 은혜롭고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때 일정을 마치고 몸이 아픈 상태에서 블라디보스톡에서 하바로브스크로 가는 긴 여정의 밤 기차에서 갑자기 어려서부터 의사와 전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살려주신다면 이 땅으로 선교를 나오겠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왔지만, 국내 의료선교는 계속 하면서도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학공부를 했지만 신대원을 나오지 않았고, 러시아에는 아는 사람도 없고, 어떤 방법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오랫동안 노인대학에서 의료봉사를 하던 행당동 성광교회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의료봉사를 가야 되는데 진단과 처방을 도와달라고 해서 두 번째로 러시아에 가게 되었습니다. 비자를 통보하는 과정에서 현지 선교사가 고등학교까지 한 교회에서 예배드리던 후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번째 러시아 의료선교에서는 읍 단위 국립병원에서 병원 한 층을 내줘서 환자들을 진료하게 되었는데 이 곳에서도 많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고, 결정적으로 우울증으로 자살도 여러 번 시도했던 여자 분이 사암오행침이란 침법으로 맞춤 치료를 받고 우울증이 완전히 사라져 새 삶을 사는 것 같다는 고백을 했고, 그 소식이 병원장까지 알게 되어 러시아에 남아 줄 것을 제의받았습니다.

저도 기도하던 게 있고 소망 하던 터라, 현지 선교사와 의논하여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가 2007년 8월이었는데 비자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선교사나 비즈니스로 입국하는데 1년 비자를 주었는데 2007년 10월부터 3개월로 바뀌고 의료관계자는 양국이 조약이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2008년에 송정교회에서 평신도자비량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러시아로 의료선교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비자가 끝날 때마다 3개월마다 한 번씩 왔다 갔다 하면서 선교를 하다 보니 오고가는 경비도 많이 들고, 평신도선교사다보니 교회서 나오는 선교비도 적어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3개월에 한 번씩 오고 가는 경비도 부족한데, 의료에 필요한 물품은 계속 구입해야 되고, 의료선교를 계속하다 보니 1000만원정도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2011년부터 국제사랑재단에서 의료선교에 필요한 선교비를 후원해서 더 이상의 빚은 지지 않게 되었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이곳 라즈돌리나는 북한 김일성 부자가 살던 집이 있고, 이곳에서 스탈린이 우리 고려인들을 기차로 중앙아시아도 실어 보낸 악명 높은 기차역이 있는 우리나라의 아픈 기억이 있는 곳입니다.

처음에는 센터에서 진료를 하게 되었고, 센터가 언덕 위에 있다 보니 많은 환자들이 오기가 힘들고, 대부분이 정교회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라 교회가 이단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고, 아이들은 교회는 이단이라고 학교에서 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보니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못 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2012년 지금의 교회 건물을 수리하면서 2층은 교회 본당과 식당, 그리로 숙소로 사용하고, 아래층은 노인정과 무료급식실, 진료실의 공간을 만들게 되면서부터 언덕을 오르지 않고,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진료 후에 간식이나 차를 마실 수 있게 되니 환자들이 많이 오게 되었고, 한 주일에 3번씩 10번이 1주기인 침을 맞으면서 자연히 주일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옛날부터 군요충지로 지금은 외곽으로 나갔지만 젊을 때부터 혼자되신 할머니가 많이 계십니다만 체제가 달라져 정부에서 옛날 같은 지원이 많이 줄었습니다.

교회에 나오시는 노인 분들이나 가족들이 소천하면 교회에서 장례를 치러주고 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교회 나오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8년 동안 많은 환자를 치료하면서 단독으로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분 두 분과, 심한 화상으로 대퇴부를 절단해야 하는 분, 중풍으로 반수불수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분들이 화장실 출입과 지팡이를 이용해서 걷는 사례는 많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침만 놓아주던 사역이 지금은 마사지와 질병에 필요한 양약도 조제해주고, 때로는 생활용품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의료혜택이 적기 때문에 전문의약품이 많이 필요합니다.

이 지역에는 물에 석회질이 많고, 육식과 설탕, 소금을 많이 섭취해서 고혈압과 신장결석, 당뇨가 거의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먼저 신학공부를 더 심도 있게 하고, 그리고 의료사역을 더 넓은 지역으로 특화시켜 나갈 꿈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광활한 영토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음이 더욱 견고하게 다져지는 초석이 되기를 소망하며 하루하루 생활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하는 일은 의료선교, 노인정 관리, 무료급식 봉사자들 관리, 신학교 수지침 강의, 교무행정을 보면서 수업도 듣고 있습니다. 이곳 동북아신학교는 국제사랑재단에서 후원하고 있지만 더 많은 후원이 필요합니다.

강사는 한국에서 오셔서 한 달에 한번이 원칙이나 두 번을 하는 때도 있습니다. 수업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5일 동안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집중 식으로 합니다. 강사로 오시는 분은 자비량으로 오셔야 되며, 가능하시면 5일 동안 학생들의 식사나 간식에도 도움을 주시면 감사한 것이 저희 신학교의 바람입니다.

학생은 10~15명 정도이고 학점위주라 수시 입학이 가능하며, 연령은 제한하지 않습니다.

러시아는 정교회가 국교인 나라이다 보니 헌신 자들이 없어 학생이 매우 귀합니다.

저희 캠프는 동북아신학교인 건물과 대표선교사의 사택이 있고, 10분 거리에 위치한 제가 거주하는 있는 라즈돌리나교회(알베르트전도사), 첫 번째 지교회 알레니보드교회(갈리나전도사, 통역, 교회서류담당), 2012년 9월에 두 번째 개척한 바라노브스키교회(유다전도사), 하바로브스키 소수민족이 사는 작은 섬에 울리까교회(유철선교사 - 북한에서 러시아로 귀화)가 있습니다.

이곳은 교통이 불편해서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들을 심방할 때는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날씨가 춥다보니 중풍이나 동상을 입은 환자들이 마비가 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심방을 가야하는데 자동차가 없다보니 심방이 용의치 않습니다.

의료사역 중 월, 수, 금은 본 교회(라즈돌리나교회) 정기 진료, 목요일은 무료급식을 돕는 봉사자들 진료, 토요일은 영사관과 비즈니스로 이곳에서 근무하는 분들을 진료하고, 주일에는 예배 후 먼 곳에서 주일만 오시는 분을 진료하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쉬는 화요일에는 격주로 지교회를 방문 진료하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자동차가 없어서 보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동안 시간과 여유가 없어서 언어연수를 못해서 의사소통이 매우 어려웠는데 지난 해년부터 국제사랑재단에서 후원해 주셔서 일주일 2번 3시간씩 러시아어 기초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학교는 40㎞ 떨어진 곳에 있는데 제가 있는 곳이 시골이다 보니 대중교통이 매우 불편하여 센터 차량을 이용하는데 선교에 필요한 차량이다 보니 사용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진료 심방과 언어연수를 위해서 자동차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제가 있는 라즈돌리나는 19세기와 21세기가 공존하는 시골마을입니다.

이곳이 있는 모든 사람이 복음화 되는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

기도제목

1. 건강과 사역을 위해서
2. 의료 선교하는데 러시아 정부와 마찰이 없기를(외국과 의료협정 없음)
3. 라즈돌리나 전 주민들의 복음화를 위해서 (약 1만명)
4. 의료사역에 필요한 물품이 부족하지 않게 채워주시기를(고혈압, 당뇨, 관절염 전문의약품)
5. 심방용 자동차가 주어지기를(일본 중고차 1000만원 이상)
6. 이곳에 선교한방병원이 세워지기를

(후원 문의 : +7 908 991 0074, 010 3600 6695)

정리=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