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배우 조진웅(본명 조원준·40)이 영화판에 발을 들인지 어느덧 12년. 데뷔작 ‘말죽거리 잔혹사’(2004)부터 차곡차곡 필모그래피에 쌓아올린 작품 수만 50여편에 달한다. 주·조연, 단역을 가리지 않고 묵묵히 걸어왔다. 그리고 드디어, 조진웅 전성시대가 열렸다.
‘끝까지 간다’(2013) 때쯤부터였을까. 소름끼치게 연기 잘하는 이 ‘곰’상 배우를 향해 “섹시하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암살’(2015)에서 조짐을 보이더니 tvN 드라마 ‘시그널’에서 터졌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정의를 외치는 이재한 형사가 여심(女心)을 앗아갔다. 그렇게 조진웅은 ‘아재파탈’(아저씨+옴므파탈)의 대표주자가 됐다.
“왜 아재야 또(웃음). 하긴 아저씨는 맞지. 결혼도 했으니.” 최근 서울 종로구 팔판로 한 카페에서 만난 조진웅은 아재파탈 인기를 실감하느냐는 질문에 쑥스럽게 웃었다. 인기에 연연하는 스타일은 아니지 않느냐는 말을 건네자 “그렇지만 의식은 한다. 보는 눈이 있다는 건 분명 내가 책임져야할 영역이 있다는 것일 테니 무게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 무게감이 마냥 날 짓누르는 게 아니라 흔들리지 않게 하는 중심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팬들이) ‘오빠 저 왔어요!’ ‘어, 형!’ 그러는 걸 보면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죠.”
조진웅은 흔들림 없이 또 바쁜 걸음을 내딛고 있다. ‘아가씨’ 개봉 이후 불과 한 달 만에 ‘사냥’으로 돌아왔다. 홍보 일정까지 연달아 이어져 지칠 법도 한데 결코 멈추지 않는다. 다음 달 방영될 tvN ‘안투라지’에 이어 차기작 ‘보안관’ 촬영에 들어갔다.
그런 그에게도 배우라는 직업은 늘 어렵고 괴롭고 힘들단다. “배우 언제 그만두고 싶으냐고요? 매일이요. 정말 매일. 매 순간. 근데 말은 못하죠. 한번은 와이프가 그런 얘길 하더라고요. 가끔 당신 옆에 있기 힘들어서 도망가 버릴까 생각도 했다고. 왜 안 갔느냐고 물었더니 ‘당신은 도망갈 데가 없잖아’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사는 것 같아요. ‘소주나 한 잔 합시다’ 하면서 또 하나 넘어가고.”
그럼에도 자꾸만 붙잡고 매달리고 싶다. 평생 작품을 해주면 안 되냐고. 언제까지고 당신의 연기를 보고 싶다고. 늘 우리 곁에 있어달라고.
-시그널 마치고 여행을 다녀왔다고 들었다.
“네. 지난 3월에 2주 정도 다녀왔어요. 작품 끝내고 나서 이렇게 여행간 게 처음이었어요. 털어낸다고 해야 하나? 그런 걸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여행을 가니) 진짜 많이 정리가 되더라고요. 이렇게 좋은 걸 왜 지금까지 안했을까, 굉장히 필요한 시간이라는 걸 깨달았죠.”
-작품에서 표현해야 하는 감정이 깊었기에 풀어내는 과정이 더 필요했던 걸까.
“그건 사실인 것 같아요. 현장에 가면 어쩔 수 없이 작업을 해야 하지만 책(시나리오) 읽을 때 진짜 괴로웠거든요. 특히 피해자들의 감정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는 게 정말 괴로웠어요. 이래서 배우들이 단명하는 구나 싶더라고요.”
-앞서 기자간담회 때는 ‘이재한 캐릭터가 재미없다’고 했었는데.
“재미없죠. 그렇게 정의롭고 단편적인데 재미있는 캐릭터를 본 적이 없어요. 그나마 그런 게 있었죠. 이 친구가 가지고 있는 진심이 있다면 그것이 (나를 통해) 표현돼야 한다는 마음.”
-이재한 캐릭터에 각별한 애정이 있을 것 같다.
“많이 닮아가려고 노력하죠. 그런 캐릭터를 연기했으니 나도 그렇게 좀 더 솔직하게 세상에 대해 얘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글쎄, 근데 실제 조진웅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못 살고 있어서(웃음).”
-사냥에서 연기한 쌍둥이 형제 동근·명근(1인2역)은 느낌이 많이 다르다. 이번에는 캐릭터에 어떻게 접근했나.
“일단 캐릭터에 당위성이 분명히 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왜 그들이 산에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런 부분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공간이 던지는 (감정의) 골이 깊더라고요. 그래서 디테일한 톤이라도 짚고 넘어가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럼에도 놓친 점이 많았어요. 뭐에 홀린 것처럼.”
-어떤 지점을 놓쳤다고 생각하나.
“현장 자체가 갑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릴 때가 많았어요. 철저히 계산하고 왔는데도 계획대로 되지 않아 다들 ‘멘붕’에 빠졌죠. ‘도대체 우리가 이 산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왜 여기 있지?’ 그런 눈빛들이 보여요. 누가 뭐라고 얘기할 수도 없는 지경이 돼버린 거예요. 그때 제가 나섰죠. ‘접읍시다.’ 그럴 땐 다음 날 다시 하는 게 훨씬 나아요.”
-1인2역이라 더욱 어려운 지점이 많았을 것 같다.
“기대를 많이 했는데 아쉽긴 해요. 좀 더 재미있게 풀고 싶었는데 책에 나온 분량이 이것밖에 안 돼서…. 그래도 대본 리딩 때는 엄청 웃겼어요. 나 혼자 (두 가지 역할을) 다하니까. 그냥 보면 ‘저 새X 뭐하는 거야?’ 싶다니까요(웃음). 실제 대면신 촬영 때는 대역 배우와 마주보고 한 방향씩 찍었어요. 저랑 키도 비슷한 분이었는데, 대본을 다 외워 오셔서 합을 맞춰줬어요. 상당히 고마웠죠.”
-산 속을 달리는 장면이 많았고, 특히 한겨울(12월)에 찍은 수중신은 너무 고생스러웠을 것 같다. 안성기도 수중신 촬영 때 엄청 떨었다고 하더라.
“치, 근데 제일 먼저 들어가 있어?(일동 폭소) 와, 정말 너무 추웠어요. 어디 마비된 것 같고 막 죽을 것 같더라고요. 근데 안성기 선배는 늘 (물속에) 먼저 들어가 계세요. 그러면 전 투덜거리면서 따라 들어가고(웃음). 선배님은 현장에서 전혀 힘든 내색을 안 하셨어요.”
-배우의 어떤 자존심 같은 거였을까.
“정말 많이 뛰고 구르고 액션을 하셨는데 분명 쉽지 않았을 거란 말이죠. 그런데도 그런 모습을 안 보이신 건 어떤 의지나 의식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이 작품에 갖는 본인의 의미도 있으셨을 테고요. 체력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데 안성기 선배님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으셨어요. 내가 만약 저 연배까지 연기를 한다면 저럴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나라면 못할 것 같아요. 물론 (그때까지 배우를) 하지는 않겠지만.”
-아니, 왜 그때까지 안하겠다는 건가.
“미래를 정해놓고 살면 재미없잖아요. 그때 되면 뭐 또…. 안 해도 되겠지.”
-천상배우라고 생각했는데 평생 할 생각은 없다니 굉장히 의외다. 막연하게나마 본인이 그리는 미래의 모습이 있나.
“(사람들이) 재미없어하고 보기 싫어하고 그럼 그만 해야지. 굳이 ‘봐주세요’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그게 배우의 숙명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배우 작업은 상당히 흥미롭고 항상 긴장되고 재미있어요. 계속 재생산되니까 소모된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어요. 그런 걸 계속 느끼고 싶긴 해요. 근데 언제까지 하리라고 정해둔 건 없어요.
작품 할 때마다 괴로울 때가 많아요. ‘내일 이 신을 찍어야 되는데’ 생각하면 잠도 안 오고 정말 죽을 것 같아요. 아무도 도움을 줄 사람이 없잖아요. ‘레디 액션!’ 하는 순간 나 혼자 싸워야 하는 게 너무 공포스러워요. 가끔 조울증도 와요. 보통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애쓰는데 배우는 오히려 재생산해야 하니까요. 세상 어느 직업군이 힘들지 않겠느냐만, 감당하기 버거운 게 사실이에요.”
-힐링이 필요할 것 같다. 본인만의 방법이 좀 있나.
“현장에 가면 그런 게 싹 날아가요. 우리 팀이 있으니까. 70~100명 되는 그 수많은 사람이 전부 한 팀이잖아요. 각자 누구의 귀한 자식들인데 그 한 쇼트를 만들기 위해 새벽부터 모여서 그 고생을 한단 말이죠.”
-그게 다작(多作)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 같다.
“그게 전부예요. 지금도 안투라지 현장에 빨리 가고 싶어요. 진짜 재미있거든요. 근데 다작 하는 건, 그냥 팔자인 것 같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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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