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김혜수(46)라는 배우를 모르는 이가 몇이나 될까. 영화 ‘깜보’(1986)로 데뷔해 30년 동안 한결같이 정상을 지킨 그의 존재감은 단연 독보적이다. 여배우의 대명사로 통하면서도 친근감을 놓지 않고 대중의 곁에 있는 것 또한 김혜수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작품 열정이 잦아들기는커녕 더 활활 타오른다. 재작년부터 영화 ‘차이나타운’과 ‘굿바이 싱글’을 연달아 찍은 뒤 겨우 3일 쉬고 tvN ‘시그널’ 촬영에 들어갔다. 2달 만에 본인 분량 촬영을 끝내고 또 3일 휴식을 취한 뒤 바로 차기작 ‘소중한 여인’에 합류했다. 일정을 맞추기 거의 불가능해 출연을 망설였던 시그널이 그렇게 대박을 친 것이다.
제작기간이 밀려 시그널 이후 선보이게 된 영화 ‘굿바이 싱글’에서는 힘을 쭉 뺐다. 오랜만에 코미디에 도전했다. 늘 톱스타였던 그가 처음으로 작품 안에서 톱스타 역을 맡았다.
극 중 연기한 고주연과 실제 김혜수는 직업 말고는 별로 닮은 부분이 없다. 단, 화려한 삶 뒤 감춰진 고민과 고독만큼은 적잖이 통하는 지점이 있었다. 최근 서울 종로구 팔판로 한 카페에서 만난 김혜수는 “솔직히 배우라는 직업이 내 길인지 아직도 모르겠다”며 “난 배우로서의 자질이 별로 없고 성격도 맞지 않는다고 느낀 적이 많다”고 털어놨다.
천생배우라고 여겼던 이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고백에 순간 멈칫. 지난 배우 인생을 돌이키는 김혜수의 눈가는 이따금씩 촉촉해졌다.
-굿바이 싱글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줬기에 출연을 결심했나.
“3년 전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어요. 그때 제가 이런 감정을 굉장히 크게 느끼고 있었어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도 진짜 내 편이 있을 수 있구나. 그런 감정을 소중하게 경험하고 있던 터라 작품에 더 공감했던 것 같아요.”
-어떤 경험이었는지 물어봐도 되나.
“일과 상관없는 사적인 것이었어요. 물론 좋은 일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겠죠? 그때 저에게 그런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내 친구들, 진짜 내 편, 내 사람. (그들이) 날 지켜주고, 살려준다는 생각까지 들었죠.”
-굿바이 싱글 촬영을 앞두고는 유독 부담이 컸다고 들었다.
“제가 코미디를 잘 못하거든요. 유머 센스가 부족한 편이기도 하고요. 하고자 하는 얘기가 너무 좋아서 하겠다고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코미디에 대한 부담이 있어요. 과거 코미디나 로맨틱코미디가 트렌드였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 당연히 저도 그런 작품을 많이 했죠. 그런데 이런 장르를 하다 보면 뭔가 더 해야 된다는 강박이 커지더라고요. 자연히 캐릭터 자체로 숙성되기보다 장르 자체에 매몰됐죠. 그러니 작위적이고 과장되고 과잉된 연기가 나왔고요. 그렇게 스스로 좌절했던 기간이 있어서 코미디는 제게 두려운 장르였어요.”
-김혜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니.
“다 그럴 때가 있죠. 차수현(시그널에서 김혜수가 맡은 역할 이름)도 처음에는 서툴러서 야단맞잖아요. 그게 일반적인 거 같아요. 다들 그렇게 시작하죠.”
-배우 김혜수는 참 오랜 기간 사랑을 받고 있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내 이유? 몰라요(웃음). 주로 위대하고 대단해 보이는 게 눈에 띄겠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것들이 그렇게 큰 부분을 압도한다고 믿어요. (그런 요소가) 한 가지는 아닐 거예요 아마. 꼭 내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에요.”
-어릴 때부터 쭉 연기를 해왔다. 이 길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이 있었나.
“솔직히 이게 내 길인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내 선택이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시작을 했거든요. 이 일을 하면서 몸도 정신도 성장을 했고,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겠죠. 꽤 오랜 시간 배우로 살았지만 너무 벅차다고 느낀 적이 많아요. 실제로 다른 꿈을 꾸기도 했어요. 자연스러운 거죠. 아직 그 과정에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저희 일은 대중 앞에 나서서 소통하는 거잖아요. 누군가가 나를 봐주지 않고 ‘제발 됐어. 그만’하면 그만해야 하는 거예요. 나 열심히 했다고, 내 인생 바쳤다고 잘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저희 직업 자체가 그런 결정권이 없는 것 같아요.”
-‘결정권 없는 직업’이라…, 그게 어떤 느낌일까.
“어딘가를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경우보다 머무르고 싶지만 떠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을 거예요. 이건 내 일임과 동시에 나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인터뷰에서 ‘배우는 파장이 큰 삶을 살게 된다’는 얘기를 했더라.
“개인적인 파장 혹은 인생이 개입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거든요. 우리가 보내는 과정 자체가 대중과 공유하는 시간이잖아요. 좋은 면이든 나쁜 면이든 운명적으로 감수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요. 누가 대신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평생 남에게 보여지는 삶을 살았는데, 일탈하고 싶은 적은 없었나.
“어떤 시기에 제 감정이나 의지와 충돌하는 상황이 생기면 그런 욕망을 느끼죠. 누군가가 정해놓은 걸 억지로 수행해야 할 때, 그에 대한 반감이나 부작용이 있잖아요. 저도 그랬던 시기가 있었겠죠.”
-대중이 김혜수라는 배우에게 갖는 선입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당당하다거나 솔직하다거나.
“솔직한 건 맞아요. 근데 솔직한 것과 거침없는 건 좀 다른 것 같아요. 또 당당하다고 매사에 자신 있는 것도 아니죠. 사람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잖아요. 이미지라는 건 누군가에 대한 총체적인 느낌이나 감정으로 규정되는 경우가 많죠. 맞는 부분도 있지만 실제로 그 정도까지는 아니기도 해요.”
-미디어에서 만들어진 부분도 있을 테고.
“물론 있죠. 내가 이만큼 가진 걸 더 크게. 근데 일부러 만든 게 아니라 어떻게 하다 보니 그 포인트가 강조된 거죠. 저는 사실, 솔직하게 얘기하지만 내심 조심스러워 해요. 왜냐면 제가 거침없진 않거든요. 거침 있어요.(일동 폭소) 근데 솔직하지 못할 거면 얘기를 안 하면 되지 뭐 하러 거짓말할 게 있느냐는 주의예요. 저는 그냥 단순해요.”
-최근 드라마와 영화가 다 잘 됐다. 매체의 경계가 없는 느낌이다.
“최근에 그랬죠(웃음). 물론 경계는 없어요. 우리나라 시장도 좁은 데 굳이 경계를 만들 필요가 뭐가 있어요. 매체 특성이 다른 건 있죠. 어쨌든 우리는 연기를 하면 되는 거예요.”
-드라마는 반응이 빠르게 오지 않나.
“작품을 잘 만나서 그랬죠. 대중의 호응을 얻은 건 뭐 한 가지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전 그냥 참여한 사람 중 한 명일 뿐이에요. 그렇다고 제가 계속 그런 (흥행)드라마를 선택할 줄 알면 아무 걱정이 없겠죠(웃음). 나는 너무 좋았지만 그렇게 호응을 못 얻을 수도 있어요. 결과가 그렇지 않더라도 아름다울 수 있어요.”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나.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해주시면 되는 것 같아요. 그건 그 분들의 권리니까.”
-여자들에게는 롤모델 같은 존재다.
“근데 이러다가도 되게 실없는 이유로 무너질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상처받진 마세요. 누구나 그럴 수 있으니까.”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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