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국민투표로 EU를 탈퇴(브렉시트)하기로 한 날 24일(현지시간) 영국 BBC방송은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날 오전 캐머런은 런던 다우닝 스트리트에 있는 총리관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브렉시트 책임을 지고 오는 10월 사임하겠다고 했다. 지난 2010년 43세의 젊은 총리로 등판해 6년 간 영국을 이끌었던 그는 자신이 호기롭게 승부수로 걸었던 국민투표 다음날 그렇게 쓸쓸히 정치무대에서의 퇴장을 고했다.
BBC는 전도유망한 정치인으로 영국 정계에 등장해 지난 2005년부터 영국 보수당을 약 11년 간 이끈 그의 이력을 되짚었다. 캐머런은 1966년 10월 9일 런던에서 증권거래업자였던 아버지 이안 캐머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명석했던 캐머런은 옥스퍼드대학교에 진학, 철학과 정치학, 경제학을 공부한 뒤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1988년 대학 졸업 당시 그는 ‘막연한 이념’보다는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정치의 답이 있다고 보고 영국 보수당의 싱크탱크 격인 보수당정책연구소(CRD)에 들어갔다. 그 뒤 유력 정치인들의 보좌관으로 이력을 다졌다.
비록 1997년 첫 출마에서는 고배를 마셔야 했지만, 캐머런은 2001년 위트니 옥스퍼드셔주에서 당선돼 처음 하원의원 뱃지를 달았다. 당시에는 토니 블레어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이 집권하던 시절이었으나 캐머런은 의회 입성 후 2년 만에 야당 간부로 승진한 데 이어 2005년 선거를 앞두고 보수당의 정책조율의장을 맡았다.
이 선거 이후 캐머런은 젊은 유권자들의 표심을 잡을 수 있는 혁신적인 보수당 정치인으로 인정받으며 당 지도부를 맡았으며, 이후 여론조사에서 10년 만에 보수당 지지율을 노동당을 앞지르게 하며 지도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2010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마침내 37.8%의 지지율로 노동당을 제치고 원내 제1당이 됐다. 그러나 과반을 차지하지 못해 헝 의회(Hung Parliament·의원내각제 체제에서 안정된 행정부를 수립할 만한 과반 득표를 얻은 정당이 없는 상태)가 되자 캐머런은 57석을 차지한 자유민주당과 연정 논의에 나서며 선거 5일 만에 보수당-자유민주당 간 연정을 이끌어냈다. 그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찾아 정부 구성 의사를 밝히며 사임한 고든 브라운 전 총리의 뒤를 이어 총리에 취임했다. 그의 나이 겨우 43세 때 일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캐머런은 결국 ‘자기가 친 덫’에 빠져 몰락하고 말았다. 유럽을 강타한 미국 발 금융위기 이후 영국 보수당 정권은 기존의 복지제도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자연히 반발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보수당 정권은 화살표를 돌리기 위해 EU에 화살표를 돌렸다. 영국 내에서는 계속되는 난민 수용 압력과 높은 EU 분담금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는데, 캐머런은 이런 불만을 달래기 위해 ‘EU 내 영국의 지위 재조정 추진’ 등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2013년 1월에는 “2017년까지 EU 탈퇴를 묻는 국민투표를 시행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강력한 구호로 대중을 홀린 지도자는 그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계속해서 전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급기야 지난해 5월 총선에서도 이를 공약으로 내걸고 승리했다. 국민투표 시행은 이미 돌이킬 수가 없게 됐다.
그러나 국민투표가 임박하면서 그는 자신의 실수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라도 영국이 EU를 탈퇴하게 된다면 어마어마한 경제적, 정치적 후폭풍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뒤늦게 국민투표에서 영국의 EU ‘잔류’에 표를 달라고 선거운동을 벌였지만, 이미 난민 문제와 높은 실업률 등에 지친 영국인들의 민심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영국 선데이타임스는 이번 투표에 관련해 ‘캐머런의 일곱 가지 실수’ 가운데 첫 번째로 국민투표 공약을 건 것을 꼽았다. 정부가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올 수 있는 위험이 큰 투표를 감행하는 ‘만용’을 부렸다는 것이다. 이 신문은 잔류할 것이라고 쉽게 믿었던 캐머런의 안일함이 문제를 키웠다고 지적했다.
캐나다 시사잡지 맥클린스도 캐머런을 ‘브렉시트의 최대 루저(loser)’라고 표현하며 “캐머런의 이기적인 정치적 동기로 인해 한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게 됐다”고 혹평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는 “내 인생에 있어 영국 정부의 가장 무책임한 행보는 이번 국민투표”라고 꼬집었다. ‘설마, 별 일 없겠지’ 하는 생각으로 우물에 던졌던 돌이 사람을 맞혀 죽게 만든 격이다.
전도유망한 ‘젊은 총리’ 캐머런은 이같은 혹평을 들은 채 정치 커리어의 마지막을 맞게 됐다. 그가 사의 표명 전 마지막으로 에 남긴 말은 “영국을 유럽 안에서 더욱 강하고, 안전하고, 더 좋게 머무르는 쪽으로 표를 주신 분들께 감사한다”였다. 그는 몇 시간 뒤 기자회견장에서 “내가 다음 목적지를 향해 나라를 이끌 선장으로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
캐머런은 여동생의 소개로 파티에서 만나게 된 5살 연하의 부인 서맨다(1996년 결혼) 셰필드와 사이에서 2남 2녀를 뒀다. 그 가운데 장남 이반은 희귀병을 앓다 캐머런이 총리로 취임하기 1년 전인 2009년 6세로 숨을 거뒀다.
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