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고삐만 슬쩍 당기면… 경주마 비리 싣고 달렸다

입력 2016-06-22 17:30
사진은 기사와 무관합니다. 국민일보DB

전직 기수(騎手)인 이모(35)씨는 2012년 경마 승부조작이 적발돼 감옥에서 1년 4개월을 살았다. 2013년 8월 출소한 이씨에게 사설경마장 운영업자가 접근해 “종전처럼 기수들과 승부조작을 하자”며 2000만원을 건넸다. 이씨는 옛 ‘동료들’을 찾아가 “경마 좀 해 줘라. 많이도 안 바라고 열 번만 부탁한다”고 돈을 주려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씨는 자신이 구속될 때 동료 기수들의 범행 가담 사실을 말하지 않았었다. 그는 승부조작을 다시 하자는 제안이 먹히지 않자 한국마사회에 과거의 공범들을 신고했다. 2010~2011년 제주경마장 경기에서 기수 6명이 가담한 18건의 승부조작은 이씨의 신고 이후 3년이 더 지나서야 전모가 밝혀졌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부장검사 이용일)는 경마 승부조작 등 대규모 경마비리 사건을 수사해 한국마사회법위반 등 혐의로 33명을 기소(15명 구속)하고, 달아난 6명을 기소중지 했다고 22일 밝혔다. 전·현직 기수와 조교사·말관리사, 마주, 경마브로커, 사설경마장 운영자 및 조직폭력배 등이 망라된 구조적 유착비리가 드러났다고 검찰은 설명했다.

전직 기수 이씨의 뒤에는 조직폭력배와 사설경마업자가 존재했다. 폭력조직 ‘땅벌파’ 부두목급인 이모(47)씨는 2010~2012년 이씨에게 “기수들에게 부탁해 승부를 조작해 달라”며 모두 1억6540만원을 건넸다. 대전·충북 등지를 돌며 사설경마장을 운영하던 김모(56)씨도 비슷한 취지로 1억2050만원을 줬다. 기수 황모(31)씨는 이씨에게 승부조작을 제안 받고 “어차피 기수 생활 오래할 생각이 없었다. 이왕이면 단기간에 돈을 벌겠다”며 승낙했다고 한다. 돈을 받은 기수들은 출주 전 말을 긴장시켜 출발을 늦추거나, 경주 중 고의로 고삐를 잡아당겨 진로를 방해하는 수법 등으로 자신의 말이 배당권 밖인 3등 이하로 들어오게 했다.

경기도 과천경마장, 부산·경남경마장의 기수, 조교사, 말관리사는 경마브로커나 안마시술소 운영자 등에게 포섭돼 경마정보를 뒤로 흘려줬다가 적발됐다. 현금과 휴대전화 등을 대가로 경주마의 건강상태와 습성, 기수의 동향 등을 제공하는 식이다.

검찰은 기업형 사설경마 운영프로그램 공급 조직도 찾아내 김모(44)씨 등 9명을 기소했다. 김씨 등은 경기도 일산의 고급 아파트를 사무실로 쓰면서 3~4개월마다 거처를 옮겨 단속을 피했다. 이들은 속칭 ‘알리바바’ ‘아우라’라는 경마 프로그램을 31개 사설경마센터에 공급하고 매주 각 센터 당 50만~100만원의 수수료를 챙겼다. 자신들이 직접 200억원대 규모의 사설경마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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