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성공 이끈 일등공신들

입력 2016-06-22 09:40

호국의 달에 인천가치 재창조를 위한 지정학적 위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낙동강 전선을 사이에 두고 유엔군과 북한군은 교착상태에 있었다. 북한군의 병참선과 배후를 공격해 전쟁을 반전시킬 필요에 따라 인천상륙작전이 계획됐다.

인천에서의 상륙작전이 가능한 만조일은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 이었다. 최적기를 9월 15일로 결정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한 양동작전이 펼쳐졌다.

9월 5일부터 평양에서 인천을 포함해 군산까지의 지역을 폭격했고, 9월 12일부터 미국과 영국의 기습부대가 군산을 공격한 것과 동시에 인천 월미도를 집중 포격했다. 9월 14일과 15일에는 삼척 일대를 포격해 북한군의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작전 당일은 연합군 함대가 인천만으로 안전하게 진입하기 위해 밤바다를 밝혀야만 했다.

9월 14일 오후 7시 운명의 시간이 전개됐다. 북파 공작 첩보업무를 수행하는 한미특공대 켈로부대(KLO부대)가 5시간이 넘는 치열한 전투 끝에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팔미도를 접수하고 예정보다 10여분 늦었지만 등대불을 밝힐 수 있었다.

등대가 밝혀진 이후 전개된 것은 인천 월미도를 통한 상륙작전이었다. 9월 15일 오전 2시 인천상륙작전을 알리는 함포사격이 시작됐다. 같은 날 오전 6시 한국 해병 4개 대대, 미국 제7보병사단, 제1해병사단 등을 투입해 월미도 상륙이 성공하면서 2시간 만에 군사시설 등을 완전히 점령했다.

이어 만조를 기다려 인천의 북서쪽 해안(레드비치)과 남서쪽 해안(블루비치)으로 상륙하는 작전은 12시간 뒤인 이날 오후 5시32분에 이뤄졌다.

무엇보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따른 최대 성과는 상륙작전 이후 10일 만에 서울을 탈환해 전투 일수를 3분의1로 단축시켰다는 것이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아군의 병력 14만명과 국민 200여만명의 피해를 줄인 것으로 평가된다.

인천시 관계자는 22일 “6·25 전쟁의 대반전을 이끌었던 인천상륙작전으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된 호국의 공간인 인천을 중심으로 우리나라가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만들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인천=정창교 기자 jcgy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