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방치된 '그림자 아이들'

입력 2016-06-20 18:22 수정 2016-06-20 20:09
식당일을 마친 중국교포 맹금숙씨가 쌍둥이 아들과 함께 땅거미 지는 가리봉 시장을 지나 집으로 향하고 있다. 중국 교포 사이에서 태어난 경민이와 영민이는 아직까지 속인주의를 고수하는 한국 땅에서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금수저, 흙수저가 아니라 아예 식은 밥이라도 먹을 수 있는 숟가락조차 없는 셈이다.
몽골에서 온 사라(36.가명)씨의 6살 딸아이가 첫돌이 막 지난 동생을 돌보고 있다. 사라씨는 남편이 불법체류자로 적발 돼 보호시설에 수감 중이서 억척스럽게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엄마가 돌아 올 때까지 좁은 방에서 동생을 돌보는 일은 6살짜리 누나 몫이다. 어른들보다 큰 서러움을 작은 가슴으로 감당해내야만 하는 것이 이주민 자녀들이다.
어느덧 점심시간, 지구촌어린이마을의 어린이들이 식판을 앞에 놓고 “날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식기도를 시작한다. 한국어, 중국어 때로는 영어로 기도를 하고 나서야 아이들은 수저를 들었다.
지구촌어린이마을 어린이들은 한국어와 중국어를 모두 할 줄 안다. 한 어린이가 중국말로 물어보면 다른 아이는 자연스럽게 한국말로 대답한다. 어린이 마을에서는 부족한 한국어를 보완하는 한편 모국어 능력을 유지하는 교육을 시키고 있다.
쌍둥이 형제가 지구촌어린이마을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며 놀고 있다. 올해로 개원 3년째를 맞은 지구촌 어린이마을은 인가를 받을 수 없어 ‘어린이집’이라는 명칭을 쓸 수 없다. 정부에서 지원받는 돈도 ‘0’이다. 후원자들이 십시일반 보내주는 후원금으로 어렵게 운영하고 있다. (후원문의 02-849-1188 후원계좌 외환은행 630-004687-731 지구촌사랑나눔)
“하늘은 파랗고, 나무들은 팔랑팔랑 싱싱하고…. 하늘에서 내려다본 한국은 정말 깨끗하고 잘 정돈돼 보였어요. 마치 오래된 TV를 보다가 새 TV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중국교포 맹금숙(39)씨는 11년 전 회색빛 도시 중국 심양을 떠나 청주 공항에 도착하기 전 하늘에서 내려다 본 대한민국의 첫 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그는 몇 년 고생해 고향에 새집을 짓고, 가족들과 남부럽지 않게 살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찼다고 했다.

‘교포사절’, 당시만 해도 식당 주인들은 말씨가 다른 교포들을 꺼리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성실하고 밝은 맹씨는 늘 사장이 먼저 잡았다. 맹씨는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부지런히 일했다. 이태원의 한 식당에선 오전 5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꼬박 서서 근무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벽을 잡고 겨우 걸었고, 너무 힘들어서 소변도 잘 못 봤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모은 돈은 중국에 있는 남편에게 모두 송금했다. 10여년을 살면서 남산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다. 일하고 단칸방에 돌아오면 쓰러져 잠들기 바빴고 쉬는 날이면 밀린 빨래를 돌렸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틈틈히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지만 남편은 달랐다. 살림이 넉넉해진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가 부친 돈으로 친구들과 수시로 고기파티를 벌였다. 대부분의 돈은 복권으로 탕진했다. 한국어능력시험을 통과해 3년 전 한국에 들어온 남편은 첫 몇 달은 열심히 일하는 척 하더니 노동일이 힘들다며 매일 같이 집에서 무위도식했다. 설상가상으로 쌍둥이 아들이 태어나자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이들을 키울 수 없다며 주변에 빚만 남기고 집을 나갔다. 중국에 홀로 남은 큰아들의 등록금과 생활비까지 오롯이 맹씨의 몫이 됐다.

맹씨는 최근 병을 얻어 수술을 받았다. 골반도 뒤틀어져 교정이 필요하지만 의료혜택이 없고 가진 돈도 없어서 엄두를 못낸다. 어린 아이들 때문에 마음대로 일을 할 수도 없다. 무상교육 혜택이 있는 다문화가정아이들과 달리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말을 하는 맹씨의 두 아들은 외국국적 자녀라는 이유로 단 한 푼의 교육, 의료 및 복지혜택을 받지 못한다.

이런 맹씨에게 손을 내밀어 준 건 오랫동안 이주노동자들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힘써온 구로구 가리봉동 지구촌사랑나눔(대표 김해성목사)에서 운영하는 어린이마을이었다. 4년 전 개원한 지구촌 어린이마을은 금수저, 흙수저는 커녕 아예 숟가락을 갖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들을 위한 보금자리이다.

어린이마을에는 중국 국적의 동포 자녀나 맹씨처럼 홀로된 중국 교포 가정 아이들 80여명이 다니고 있다. 그나마 이곳 어린이마을을 다닐 수 있는 아이들은 행복하다. 미등록 체류자의 자녀는 태어나면서부터 불법체류에 무국적자이고 의료보험도 없기에 더욱 보육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런 아이들은 하루 종일 문이 잠긴 좁은 방에서 홀로 공포 속에 방치되어 있기도 하다. 이렇게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출생신고조차 못해 서류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 아이들은 2만~3만명으로 추정된다.

지구촌사랑나눔 대표 김해성 목사는 "유엔아동권리선언에는 모든 아동은 태어난 국가에 상관없이 교육받을 권리, 보호받을 권리를 밝히고 있다. 우리 대한민국은 이 협약을 비준한 국가”라며 “우리 정부는 당사국으로서 이러한 아동들의 체류상태나 조건과 상관없이 이들을 보호하고 교육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주노동자의 숫자는 크게 늘어나고 대한민국의 출산율은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 다인종, 다민족, 다문화 사회로 들어섰지만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국민정서는 여전히 배타적이고 정부정책 역시 미온적이다. 이들 미등록체류자 자녀들이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서 방치되고 국제미아로 성장하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분명 부담스러운 일이다.

무관심 속에 방치된 아이들을 따뜻한 가슴으로 보듬고 이들이 지구촌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의 손질이 시급하다. 이는 이 땅의 또 다른 아이들에게 ‘꿈수저’를 주는 일이다.

글 사진=곽경근 선임기자 kkkwa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