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올랜도의 동성애자 나이트클럽에서 일어난 최악의 총격사건으로 미국뿐 아니라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무슬림 극단주의자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저지른 테러인지, 동성애자들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혐오범죄인지 아직 불분명하지만 원인과 관계없이 그 잔인한 폭력성은 규탄 받아 마땅하다.
이같은 현실의 폭력행위는 할리우드에도 충격파를 몰고왔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할리우드 영화들이 보여주는 폭력성은 이미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할리우드 영화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의 물결이 거세게 일고 있는 것. 작가이자 감독인 마이클 쇼월터는 “폭력을 찬양하고 고무하는 할리우드에 화가 난다”면서 “영화도, 게임도 폭력을 당장 그만두라”고 일갈했다. 사실 할리우드는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세상을 위험하게 만드는 폭력을 조장하는 주범으로 공격당하기 일쑤다.
그럼에도 일부에서는 흥행 등 영화업계에 미치는 영향은 극히 적을 것으로 본다. 물론 2012년 콜로라도주 오로라의 영화관에서 심야상영 중 총격사건이 일어나 12명이 죽고 70명이 부상했을 때는 극장 관객이 다소 줄었지만 이번엔 나이트클럽에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영화관을 찾는 사람은 줄지 않을 거라는 예측이다. 다만 이런 사건이 계속될 경우 장기적으로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심리적 충격은 불가피하다. 이와 관련해 영화 흥행분석가인 제프 보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현실도피를 위해 영화를 본다. 그러나 올랜도 학살 같은 사건으로부터 도피하기는 정말 어렵다. 영화 관객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사건의 잔향(殘響)이 남아있을 것이다”.
사실 영화는 현실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영화와 폭력 간의 명확한 인과관계가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영화가 모방범을 만들어낸다거나 잠재적 폭력범에게 어떤 암시를 주는 등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일례로 1999년 미국 콜로라도주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격사건은 1994년에 만들어진 올리버 스톤 감독의 말썽 많았던 폭력영화 ‘내추럴 본 킬러(Natural Born Killers)’가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이 강력히 대두됐었다.
또 명장 스탠리 큐브릭이 만들어 지금도 그 그로테스크한 폭력성이 인구에 회자되는 ‘클락 워크 오렌지(Clock Work Orange, 1971)’는 영화가 개봉됐을 당시 영국 전역에서 영화를 모방한 살인, 성폭행 등 폭력범죄가 빈발하는 바람에 기겁을 한 큐브릭이 스스로 필름을 모두 회수하기도 했다. 게다가 1974년에 마이클 위너 감독이 찰스 브론슨을 기용해 만든 ‘추방객(Death Wish)’의 경우. 아내와 딸이 강도들에게 살해당하거나 성폭행 당한 건축가 주인공이 이제까지의 선량한 시민에서 탈피, 직접 무장을 하고 악당들을 찾아내 복수한다는 이야기는 흉악범죄에 시달리던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까지 크게 히트했지만 법을 통한 정의의 구현이 아니라 사형(私刑)을 통한 응징이라는 측면에서 사적(私的) 폭력을 부추긴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영화들 뿐 아니다. ‘폭력영화’로 분류될 수 있는 영화들은 많다. 오히려 너무 많아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그중에서 오로지 잔인하고 엽기적인 폭력장면을 통해 돈을 벌어보려는 싸구려 영화들과 폭력이라면 어디 빠지지 않는 일본 등 아시아권 영화를 제외하고 그래도 ‘영화 같은 영화’로서 악명을 떨친 폭력영화들은 이런 것들이 있다.
▲와일드 번치(Wild Bunch, 1969)=‘폭력 서부영화의 제왕’, 피를 의미하는 ‘헤모글로빈의 시인’ 등의 별명을 얻은 샘 페킨파 감독의 대표작. 영화 종반부에 윌리엄 홀든이 이끄는 무법자들과 멕시코 정부군 사이에 벌어지는 피 튀는 총격전이 압권이다. 특히 페킨파는 10여분에 달하는 이 유혈 신을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던 슬로모션으로 잡아내 ‘폭력의 미학’을 제시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페킨파 자신은 당시 사회적 이슈였던 베트남전의 폭력성을 은유하기 위한 영화였다고 주장했다.
▲더티 해리(Dirty Harry, 1971)=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실질적 출세작. 돈 시겔이 연출했다.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법과 상사의 지시를 어기는 등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열혈형사 이야기. 요즘 기준으로 보면 폭력장면이라는 게 매우 시시하지만 햄버거를 우물거리면서 범죄자를 쏴 죽이는 시퀀스 같은 것은 당시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이 영화는 ‘추방객’이 민간인에 의한 사적 폭력을 다뤘다면 공권력에 의한 ‘과도한 폭력’을 묘사함으로써 이른바 ‘경찰의 잔인성(police brutality)’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스트로 독(Straw Dogs, 1971)=‘와일드 번치’를 연출한 샘 페킨파 감독 작품. 더스틴 호프먼, 수전 조지 주연. 2011년 로드 루리 감독이 리메이크한 것도 있지만 오리지널을 따라가지 못한다. 영국의 고적한 시골마을로 살러온 미국 수학자가 마을 불량배들로부터 괴로움을 당하다 부인이 성폭행까지 당하자 분연히 일어나 복수에 나선다. 그런데 성폭행장면이나 호프먼이 불량배를 때려죽이는 등 복수장면들이 너무 적나라해 같은 해 개봉된 ‘클락 워크 오렌지’와 함께 영화폭력 논란의 기폭제가 됐다.
▲살로 혹은 소돔의 120일(Salo, or 120 Days of Sodom, 1975)=한편으로는 명장, 한편으로는 괴짜 소리를 듣는 이탈리아의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다. 새디즘의 시조인 사드 후작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으로 단순히 폭력만 난무하는 게 아니라 구토가 나올 만큼 역한 장면들이 많다.
▲로보캅(Robocop, 1987)=네덜란드 출신 폴 베어호벤 감독의 SF. 나중에 로보캅으로 재탄생하는 경찰관 주인공이 악당들에게 당하는 장면, 영화 후반부에 악당들이 로보캅에게 당하는 장면들이 과잉 폭력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토털 리콜(Total Recall. 1990)=역시 폴 베어호벤 감독의 SF. 주인공 아놀드 슈워체네거는 이 영화에서 거치적거리는 악당 77명을 죽인다.
▲나홀로 집에(Home Alone, 1990)=크리스마스 때면 TV에서 단골로 방영되는 아동용 홈드라마. 그러나 실제로는 엄청난 폭력성을 지닌 잔인한 영화다. 특히 이는 주인공 케빈네 집에 침입한 좀도둑들 입장에서 그러한데 머리에 불이 붙는다든가 페인트통으로 머리를 얻어맞는다든가 유리조각이 깔린 마룻바닥에 넘어진다든가 3층 창문으로 떨어지기도 하는 등 현실이라면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폭력장면들이 마치 ‘톰과 제리’ 같은 만화영화처럼 웃음거리로 얼버무려진다.
▲저수지의 개들(Reservoir Dogs, 1992)=샘 페킨파의 뒤를 이어 ‘유혈극의 달인’으로 불리는 퀜틴 타란티노의 실질적 데뷔작. 바르셀로나 영화제에서 상영됐을 때 공포 및 폭력영화의 거장 웨스 크레이븐이 영화를 보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는 후문이 들릴 정도로 폭력적이다.
▲킬 빌 1,2(Kill Bill, 2003, 2004)=오우삼의 총격영화와 각종 쿵푸영화 등 싸구려 홍콩 액션영화에 심취했던 비디오가게 종업원 출신 타란티노가 홍콩영화들에 마친 오마주. 쓰레기 같은 폭력장면들을 빼면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the Christ, 2004)=배우 멜 깁슨이 만든 성서영화. 그러나 성경에서는 단순히 몇줄로 처리된 예수의 수난을 채찍질만 10분 동안 보여주는 등 지나치게 세밀하게 묘사했다. “예수의 고통을 누구나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게 깁슨의 변(辯).
▲신 시티(Sin City, 2005)=프랭크 밀러의 만화(그래픽 노블)를 밀러와 로버트 로드리게스가 공동연출했다. 특별한 장면을 제외하곤 명암 대비가 분명한 흑백으로 촬영해 폭력장면들이 더 극적으로 부각됐다. 초호화 올스타 캐스트.
▲람보 4(2008)=실베스터 스탤론이 네 번째로 람보로 출연한 영화. 감독까지 겸했다. 늙은 스탤론은 활발한 액션 대신 잔인한 폭력장면으로 영화를 채웠다. 스탤론은 이 영화에서 전편 3편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263명을 죽이는데 살상방법도 다양하다. 활로 쏴 머리 꿰어 죽이기, 개틀링 기관총으로 몸을 산산조각내거나 상하반신으로 양분하기, 정글도로 머리를 베어내거나 배창자를 끄집어내기 등.
사회의 폭력성 논란 중심에는 언제나 이같은 폭력영화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Show Must Go On(쇼는 계속돼야 한다)’이라는 쇼 비즈니스업계의 금언이 말해주듯 폭력영화는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게 거의 틀림없다. 폭력과 섹스야말도 가장 확실하게 돈 벌어주는 화수분이니까.
김상온 (프리랜서 영화라이터)
[김상온의 영화이야기] <75>폭력과 영화
입력 2016-06-20 1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