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30일까지 선화랑 ‘성산일출봉’ ‘서귀포항’ 등 여백 살린 신작 30여점 전시
도심의 새벽 불빛을 강렬한 색채로 붓질하는 ‘빛의 작가’ 김성호(54)는 2014년 제주도로 작업실을 옮겼다. 그림이 비교적 잘 팔리는 인기작가로 휘황찬란하면서도 어슴푸레한 도시 불빛에 몰두하다보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고심하다 지인의 소개로 제주도에 터를 잡았다. 작업 소재는 새벽의 불빛이라는 점에서 이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성산일출봉’ ‘산방산’ ‘서귀포항’ 등 제주 앞바다에 비치는 불빛을 화면에 옮긴 것 역시 서울 한강 또는 부산 해운대의 새벽 풍경을 그린 이전 작품과 비슷하다. 하지만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새벽의 여명과 가로등 불빛에 흔들리는 거리의 모습 대신 인공적인 조형물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풍광이 화면에 자리 잡은 것이다.
그가 2년여 동안 제주에서 생활하며 그린 작품 30여점을 ‘섬 불빛 바다, 그리운 제주’라는 타이틀로 30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선화랑에서 선보인다. 작가는 “제주는 풍경에 집중할 수 있어서 매력적”이라며 “도시 이미지를 빼고 자연의 모습을 제 자신만의 색채와 구도로 담백하게 담아내고자 하는 새로운 작업의 첫걸음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박준헌 미술평론가는 ‘눈을 감아야 보이는 그리움: 김성호의 작품에 대해’라는 글에서 “그린다는 것은 그리움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리움은 무언가를 그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그리워 할 수 있기에 표현할 수 있고, 그 표현으로 말미암아 그리움을 위안할 수 있다”고 썼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그리워 해본 사람은 굳이 그림을 해석하거나 학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림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움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사랑은 무언가를 그리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기에 희생할 수 있고, 그 희생으로 아름다울 수 있다.
김성호 작가의 작품이 동시대의 작품들과 변별력을 갖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일반적으로 보통의 작가들이 단순히 풍경을 학습된 시각적인 아름다움으로 해석하고, 흡사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 본 풍경과도 같은 화면으로 표현해 낸 것이라면, 작가는 풍경을 단편적인 평면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감각과 그리움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삶의 체취가 투영된 입체적인 의식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이를 오롯이 담아내고자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그의 그림은 도시의 야경, 빛의 강렬함, 대담한 색감과 회화적 필치 등으로 이해되지만 ‘섬 불빛 바다 그리운 제주’에서 작가가 선보이는 작업들을 통해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구상미술이 강세를 보이는 대구 출신인 작가는 초기 작업부터 삶과 밀접한 일상 풍경을 감각적인 터치로 그렸다. 특히 여명이 움트기 전 불빛과 파란 하늘의 대비로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파란색에서 회색, 노랑, 녹색 등 원색으로 눈부신 불빛을 그려내는 방식이 이색적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군더더기 없이 단순해졌다. 동양화의 여백을 되살린 그림이다.
깊이가 있는 생략과 여백은 그리움의 깊이일 것이다. 그 깊이는 눈을 감아야만 보일 수 있다. 바다는 깊이를 알 수 없기에 두렵고, 사람은 깊이를 알 수 없기에 끝없다. 우리는 그의 그림을 통해 그리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고, 시간을 초월하는 풍경을 만날 수 있으며, 깊이를 넘어서는 여백을, 상처를 치유하는 화면을 마주할 수 있다.
그의 그림에는 내음이 있고 소리가 있다. 바닷가에 숨죽인 마을 사이를 관통하는 미세한 해풍(海風), 오름 갈대밭의 서걱거림, 출렁이는 물결을 반사하는 비릿한 바다내음, 노구를 이끈 해녀들의 숨비소리 등등. 이는 사라지지 않는 기억 속 그리움이다. 시각적인 그림을 초월해 오감을 확장시키는 그림이라고나 할까.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제주의 소리와 애환이 들리는 것 같다. 천혜의 자연을 보여주는 것과 함께 자본의 유입으로 관광화될 수밖에 없는 섬의 이중성도 담았다. 원경·중경·근경의 구도로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점, 넓은 화면 대부분을 과감히 어둠으로 처리한 게 특징이다. 오랫동안 삶을 영위한 사람들의 그리움이 깃든 제주의 땅을 그만의 필치로 재탄생시켰다(02-734-0458).
이광형 문화전문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