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미디어기자박물관서 추모사진전 및 추모관 개관
'국내 최초의 북극, 남극탐험 보도사진가 김택현 기자의 삶과 흔적' 전시회 및 기념관 개관식이 6월 18일 오전 11시 박물관 도시인 강원도 영월 영월미디어기자박물관(관장 고명진)에서열렸다. 김택현 기자의 부인 이지자 여사와 가족과 지인, 박선규 영월군수, 조정이 영월군의회 회장 박찬갑 영월박물관협의회 회장, 이동희 한국사진기자협회 회장, 김문권 한국보도사진가협회 회장이 참석했다. 김택현 기자가 사진부장으로 마지막 몸담았던 국민일보에서는 이형용 전 편집국장 등 평소 김택현 국장(이하 김국장)과 가까웠던 동료들이 함께했다. 그 외에도 선후배 사진기자와 김 국장과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교인 등 80여명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이렇게 많은 기자 분들이 영월미디어기자박물관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라는 홍성순 영월군 문화관광해설사의 개회 인사에 이어 김택현 기자 추모전 준비위원장을 맡은 강두모 전 한국사진기자협회장은 김국장의 약력을 소개하면서 "이분이 취재한 것은 모두 한국 최초다. 40년 전 당시만 해도 남극점, 북극점에 도전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 수 있었던 일” 이라고 전하면서 “김 국장이 국민일보 사진부장으로 재직했던 1988년부터 5년 간이 국민일보 사진부의 최고 전성기”라고 회고 했다. 이어 추모전 축사를 한 한국사진기자협회 이동희 회장은 “이번 전시회를 76개 매체, 500여명 사진기자 후배들은 진심으로 고인을 추모하면서 축하와 존경을 표한다”말하고 “선구자적 삶을 사신 김택현 국장의 흔적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박선규 영월군수도 축하인사를 통해 “이번 전시회와 추모공간을 통해서 김택현 기자의 고결한 흔적을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됐다. 작품 하나하나의 작은 발걸음을 넘어 그의 위대한 발자국을 발견하게 돼 가슴이 뭉클하다” 말했다.
마지막으로 가족 대표 인사를 한 부인 이지자씨는 “그냥 많은 유품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이렇게 좋은 곳에 전시할 수 있게 애써주신 모든 분들께 너무 감사드린다”며 거듭 고마움을 전했다.
1부 개막식은 김택현 기자와 평소 가깝게 지냈던 비파선교회 이명희 목사의 축도로 마무리됐다. 이어서 박물관 뒷마당 야외에 마련된 추모사진전과 고인이 취재당시 사용했던 카메라와 필름, 남, 북극을 탐험했을 당시 입었던 옷과 신발 등 유품 등이 전시된 추모공간을 둘러보면서 참석자들은 고인의 생전 모습을 되돌아보고 조용하지만 치열했던 그의 삶의 흔적을 기렸다.
이번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한 고명진 관장은 “선배님의 유품과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다시 한 번 그의 사진에 대한 열정과 도전정신을 배울 수 있었다. 진심으로 존경을 표한다”면서 “앞으로도 김택현 기자와 같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사진기자 추모관을 건립하고 싶다”고 밝혔다. 영월미디어기자박물관(033-372 1094)은 사진기자 출신인 고명진 관장이 2011년 영월 동강의 한 폐교를 구입해 설립했다. 이날 전시회와 함께 '무한상상을 실천한 김택현 기자'란 주제로 토론회도 열렸다. 토론에는 강두모 전 한국사진기자협회회장의 주제발표에 이어 황종건 포토데스크 대표, 서재철 자연사랑미술관 관장, 박영택 전 강원일보 부국장, 박근원 전 경인일보 부국장 등이 토론자로 나섰다.
故 김택현 기자의 삶과 흔적
1941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택현 기자는 대구 계성고를 졸업하고 1964년 경북대학교 수의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좀 더 편한 길이 될 수도 있었던 의사 신분을 포기하고 본인의 소신대로 사진기자의 길을 택했다. 1964년 대구매일신문사 사진부 기자를 시작으로 1968년 중앙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이어갔다. 1977년 한국 최초 북극 탐험에 이어 1979년에는 한국 최초 남극 탐험 취재, 1980년에는 한국알프스원정대 부대장을 맡았다. 1980년에는 목숨을 무릅쓰고 남, 북극을 모두 탐사보도한 공이 인정돼 대통령 포장을 받았다. 1981년에는 아프리카탐험 및 킬리만자로 등정에 성공했고 중앙일보 출판부장을 지냈다.
1988년 국민일보가 창간되면서 국민일보 사진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국민일보 사진부장 시절 뛰어난 기획력과 아이디어로 국민일보 사진부는 수많은 특종상을 수상, 국민일보 편집국에서는 가장 으뜸이 되는 부서로 자리매김했다. 1993년 30년간 몸담았던 기자생활을 정리한 김택현 기자는 대구일보 서울지사장을 거쳐 1998년 교사였던 부인이 명예퇴직을 하면서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낮과 밤이 따로 없이 치열했던 한국에서의 기자생활에 늘 부인에게 미안했던 그의 미국행 결심은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배려였다. 친척이 살고 있는 뉴저지에서 김 국장은 30년 묵힌 수의사 자격증도 꺼내어 파트타임 일도 했다. 두 사람은 2006년 귀국 할 때까지 자유롭게 여행도 다니며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다.
首丘初心 이었을까, 자신의 인생 후반기를 한국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보내기로 결심한 그는 60세 중반 고향으로 돌아왔다. 늘 결정은 신중하지만 판단이 서면 서슴없이 밀어붙이는 그는 한국에 돌아온 이듬해인 2007년부터 호스피스자원봉사자, 문화복지사, 웰다잉 강사, 의료선교, 아코디언 강사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본인을 필요로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봉사활동에 헌신했다. 틈틈이 신학공부를 해 2012년에는 총신대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 안수는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받은 것이 아니라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하면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바쁜 봉사활동의 일상에서도 늘 건강을 위해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찾아왔다. 2015년 7월17일 췌장암 선고를 받은 것이다. 담담하게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한 그는 단 한차례 항암치료만 받고 불과 3개월 만인 10월 5일, 고통 없이 밝은 표정으로 사랑하는 이들의 곁을 떠났다.
그의 유언대로 영혼은 천국으로 떠났지만 시신은 아직도 후학도들을 위해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기증되어 있는 상태다.
그가 자서전을 준비하기 위해 써 논 마지막 문장을 되새겨 본다.
“인생은 해석이고 행복은 선택입니다. 인생의 후반부는 돌려받은 모든 것을 돌려주는 시간이 되고자 기도합니다. 남은 인생을 아름답게, 행복한 선택을 하여 이 생명 끝까지 겸손한 섬김의 자세가 되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영월=곽경근 선임기자 kkkwak@kmib.co.kr
천상(天上)의 보도사진가, 김택현 기자를 기리다
입력 2016-06-18 20:50 수정 2016-06-19 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