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話하다] 부산 보수동 책방거리 故 최성묵 목사

입력 2016-06-17 09:46
고 최성묵 목사의 포항고교 교사 시절. 위줄 오른쪽 끝이 최 목사이다. 1955년 사진.

 최성묵 목사(1930~1992)는 평생을 세례 요한처럼, 본 회퍼 목사처럼,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주교처럼 산 목회자다. 불의의 현장을 외면하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청소년 운동에 앞장섰다. 
 부산 보수동 헌책방 거리에 있는 '중부교회'(77년 부임) 사역을 하다가 92년 3월 22일 거리에서 과로로 쓰러져 소천했다. 
 경북 영일군 흥해면 출신으로 1950년 8월 빨치산에 의해 총상을 입었으나 구사일생으로 생환했다. 이후 서울대 수학과를 나와 흥해중과 포항고 교사를 역임했다.
 사진은 55년 포항고 재직 시절이다. 뒷줄 오른쪽 끝이 최 목사다. 크리스천 교사였던 그는 그 무렵 김재준 목사(민주화운동가·1901~87)가 포항 설교에 나서자 김 목사에 대한 자유당 정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포항고 강당을 설교 장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그 무렵 6.25당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살려만 주신다면 남은 생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약한 기억을 떠올리고 56년 한신대에 진학, 목회자가 되었다. 
1978년 4월 '부산대 자율화 민주투쟁 선언문' 사건으로 구속된 교회청년 등을 위한 기도회를 알리는 전단지.

 68년 부산 이주 이후 부산민주화운동의 대부로 활약했으며 숱한 고난을 거쳤다. 부마항쟁 배후 혐으로 모진 취조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가 이끌던  중부교회는 가난하고 갇힌 자들을 위한 성소이자 경찰수배에 쫓기는 청년, 학생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다. (출처 '최성묵 평전' 산지니 刊)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