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경찰서 교통조사계에서 근무하는 A경사(34)에게 서툰 ‘서울말’은 골칫거리다. 전화를 걸어 경찰이라고 소개하면 열에 서넛은 보이스피싱을 의심한다. 입에 붙은 경상도 사투리를 꼬투리 잡는 바람에 정작 교통사고 조사는 뒷전인 경우가 많다. 그럴 때면 경찰서 주소와 사고 경위, ‘관등성명’을 외우다시피 말하곤 한다. 그런데도 ‘내가 또 속을 것 같으냐’며 전화를 끊어 버리는 경우도 잦다. A경사는 16일 “요즘에는 ‘경찰’이라는 두 글자만 듣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는 사람도 많다”며 “의심을 덜 받기 위해 사투리를 고쳐야 할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지인도 타인도 믿지 못해
각박한 삶에 지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생각이 강해져서일까. 소통 수단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데도 우리 사회의 불신은 깊어지고 있다. 스마트폰 메신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새로운 소통 수단도 ‘나’와 ‘너’의 거리를 좁혀주지 못한다.
한국행정연구원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사회통합실태조사에 따르면 ‘낯선 사람을 신뢰하느냐’는 질문에 13.3%만 ‘신뢰한다’고 답했다. ‘전혀 믿을 수 없다’(33.5%), ‘별로 믿을 수 없다’(53.2%)는 응답이 86.7%에 달했다. 10명 중 9명은 낯선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비단 낯선 사람뿐만 아니다. ‘아는 사람’도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기업 신입사원인 박모(27·여)씨는 선배의 ‘말 바꾸기’에 시달리다 특단의 대책을 마련했다. 선배는 다른 상사들 앞에서 “나는 그렇게 지시한 적 없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느냐”며 박씨에게 면박을 준다고 한다. 달리 하소연할 곳이 없던 박씨는 지난달 통화 내용이 자동 녹음되는 스마트폰 앱 ‘○○리코더’를 설치했다.
박씨는 요즘 퇴근 후 쇼파에 앉아 드라마를 보는 대신 책상에 앉아 녹음된 통화를 들으며 내용을 타이핑한다. 덕분에 ‘녹취 풀이’라는 웃지 못 할 취미가 생겨버렸다. 박씨는 “직장 동료는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같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 깊어졌다”고 했다.
연인, 가족이라고 예외 아냐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믿음을 주는 것도 아니다. 대학생 윤모(24·여)씨는 한 시간에도 몇 번씩 스마트폰을 꺼내 ‘커플△△’ 앱을 뒤적거린다. 취업한 남자친구가 지난달 신입사원 연수를 받기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않을까 늘 신경 쓰였다고 했다. 그래서 남자친구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알아낼 수 있는 앱을 설치했다. 윤씨는 이제 남자친구가 어디에 머물렀는지, 심지어 3분 이상 통화한 전화번호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남자친구가 미덥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다만 서로 적당한 의심을 가져야 신뢰가 더 커지는 법”이라고 했다.
여기에다 ‘자식 걱정’이 감시로 이어지기도 한다. 학부모 최모(40·여)씨는 초등학생 아들(11)과 최신 스마트폰을 사주는 대신 ‘□□펜스’라는 앱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모바일 게임에 빠져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음란물을 찾아서 웹서핑을 할까봐 두렵기도 했다. 최씨는 아들이 스마트폰으로 뭘 하고 있는지를 어디에서나 들여다 볼 수 있다. 게임 시간을 제한할 수도 있다. 최씨는 “아들이 믿지 못하느냐며 툴툴거릴 때는 마음이 약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신뢰보다 감시가 필요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IT시대의 ‘그늘’
어쩌다 우리는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됐을까. 전문가들은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발달이 되레 ‘불신사회’를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박은아 대구대 교수는 “예전과 달리 언제, 어디에서나, 만나는 그 순간까지도 약속을 깨뜨릴 수 있게 됐다”며 스마트폰을 불신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상대방이 약속한 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늘면서 사랑하는 사람조차 믿지 못하게 될 때가 많다는 설명이다.
쉬워진 감시와 통제가 신뢰를 떨어뜨린다는 진단도 나온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스마트폰 등 통신기기의 발달로 상대방을 손쉽게 통제할 수 있게 됐다”며 “신뢰를 얻기 위해 소통하는 대신 감시와 통제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생겼다”고 말했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대 사회에서 ‘깊은 관계’보다 ‘얕은 관계’가 늘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녹음, 감시, 차단 등을 통해 서로 ‘불신’을 쉽게 드러낼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신훈 오주환 권준협 기자 zorba@kmib.co.kr
‘불신 한국’ 지인도 타인도, 심지어 가족도 못믿는다
입력 2016-06-17 0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