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사람] 최초의 서프러제트, 에멀린 팽크허스트(1858~1928)

입력 2016-06-14 23:01 수정 2016-06-14 23:02
1914년 시위 도중 경찰에 연행되는 에멀린 팽크허스트 (출처: 위키피디아)


“노예로 사느니 반역자가 되겠어요(I would rather be a rebel than a slave).”

그는 평생 자신의 생일이 7월 14일이라 믿고 살았다. 오늘날 프랑스의 국경일이자,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출생신고서에 적힌 생일은 하루 뒤인 15일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여성 혁명’은 그에게 곧 운명이어야만 했다.

곧 국내 개봉을 앞둔 영화 ‘서프러제트(Suffragette)’는 여성참정권 운동에 한 획을 그은 에멀린 팽크허스트(사진)를 다뤘다. 영국 우파의 상징 마거렛 대처 전 총리를 연기한 배우 메릴 스트립이 역대 가장 극렬했던 여성운동가로 분한 것도 화제였지만, 무엇보다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 집단 ‘서프러제트’를 정면으로 다룬 첫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오늘, 6월 14일은 서프러제트 운동을 선두에서 이끈 에멀린이 눈을 감은 날이다.

에멀린이 여성참정권연맹(WFL)을 설립한 건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당한 지 정확히 100년 뒤인 1889년이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여성참정권협회국민동맹(NUWS)의 비폭력 운동에도 불구, 보수당과 자유당이 참정권 논의에서 여성을 제외하는 일이 반복됐다. 4년 뒤인 1903년에 에멀린은 여성사회정치동맹(WSPU)을 조직한다. WSPU는 기존 여성운동 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행동에 나섰다. 러시아 혁명가들처럼 단식투쟁에 나서는가 하면 성공회 교회에 불을 질렀다. 런던 옥스퍼드 거리는 이들이 깨뜨린 창문으로 난장판이 됐다.

여성들은 왕실이 자신들을 볼 수 있도록 버킹엄궁 난간에 몸을 매달고,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경찰관을 공격했다. 남성들의 놀이터인 골프장은 여성들의 공격에 박살이 났다. 당시 수감된 여성들의 단식투쟁에 이골이 난 정부는 단식으로 허약해진 수감자들을 풀어줬다가 건강해지면 언제든 잡아넣을 수 있는, 이른바 ‘고양이와 쥐’ 법을 내놓기도 했다. 1913년에는 이 단체 소속 여성운동가 에밀리 데이비슨이 여성참정권을 위해 조지 5세의 말 아래 몸을 던졌다가 사흘만에 세상을 떠났다. 

에멀린은 후일 회상했다. “잉글랜드는 물론 세계 그 어디에서도 그런 시위는 없었다. 우리는 중요한 모임마다 난입해 폭력적으로 내쳐지고 모욕을 받았다. 우리는 종종 평화롭게 멍이 들고, 다쳤다.” 일간지 데일리메일은 그들을 ‘참정권’을 뜻하는 영단어 ‘Suffrage’를 본 따 ‘서프러제트(Suffragette)’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는 20세기 초 세계 여성인권운동가들을 상징하는 단어가 됐다.

에멀린의 남편 리처드 역시 여성의 권리 신장에 적극 나선 활동가였다. 21세 나이의 에멀린과 결혼한 그는 결혼 이전인 1870년과 결혼 뒤인 1882년에 기혼여성재산법안(Married Women's Property Act)을 만들었다. 결혼 뒤에도 여성이 수입과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이었다. 1898년 연인이자 동료인 남편을 잃은 뒤 에멀린은 한동안 상실감에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둘 사이 낳은 딸 크리스타벨과 실비아, 아델라는 남편 대신 에멀린의 옆에 남아 함께 싸웠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서프러제트 운동은 막을 내렸다. 전쟁 동안 후방에서 영국군을 지원한 에멀린은 전후에도 WSPU를 바탕으로 여성당(Women's Party)을 창당하는 등 성평등을 위해 싸웠다.  마침내 영국 여성이 남성과 법적으로 완전히 동등한 참정권을 획득한 1928년, 에멀린은 주어진 소명을 다했다는 듯 세상을 떴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