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는 길 비켜라"...미술한류 '책가도' 나가신다!

입력 2016-06-12 12:27
정조 때인 18세기부터 시작된 책가도에는 책 뿐 아니라 중국에서 수입된 귀한 도자기, 청동기, 시계 등을 함께 배치해 그 자체가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 구실을 했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제공

정조는 ‘미술 정치’를 한 조선 최초의 왕이다. 태조 이래 왕의 상징이었던 일월오봉도를 치우고 어좌 뒤에 책가도(서재 그림) 병풍을 둘러쳤다. 1791년의 일이다. “당쟁은 그만하고 학문에 힘쓰시오.” 미술로 일갈한 무언의 통치술이었다.
일화는 또 있다. 이보다 앞선 1788년. 정조는 자비대령화원(화원 중 최고 실력자로 구성)인 신한평(신윤복의 아버지)과 이종헌(책가도의 대가 이형록의 할아버지)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해괴한 그림이 있나. 쯧쯧.” 대로(大怒)한 정조는 둘을 귀양 보냈다. 그러곤 새로 자비대령화원에 임명한 장한종에게 다시 그리게 했다.
지난 7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재개관 기념 2탄으로 마련한 ‘조선 궁중화·민화 걸작: 문자도·책거리’ 전시장은 그야말로 걸작들의 잔치다. 그 큰 벽면마다 책가도를 딱 한 점씩 진열했다. 그만큼 걸작이 풍기는 기운이 강하다.
책가도…정조의 책정치·미술정치로 시작돼 200년 풍미한 장르
장한종이 그렸다는 책가도도 나왔다. 서재 그림의 윗부분에 휘장을 쳤다. 휘장은 권위와 위엄을 높이기 위해 초상화에 쓰던 장치다. 책을 사랑했던 군왕의 마음을 읽었던 화원 화가의 예리한 촉각이 읽힌다.
책가도는 정조 때 유행이 시작돼 양반가로, 민가로 확산됐다. 20세기 초까지 그려지며 200년 이상 사랑을 받았다.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이 장기간 유행한 장르라고 미술평론가 윤범모 전 가천대 교수는 말했다.
왕실에서는 유교 이념을 심기 위해 ‘효제충신인의예치(孝悌忠信仁義禮恥)’ 8글자를 쓴 병풍 그림인 ‘유교 문자도’를 전파했다. 통치자의 뜻과 다르게 책가도와 문자도가 사랑받은 데는 과거 급제하려는 양반가의 출세욕이 투영돼 있다. 양반호적을 산 부유한 중인에게는 지적 허영을 위한 장식물이기도 했다.
민관 협력으로 최초 공개 걸작 수두룩…다시 만나기 힘든 눈의 호사
전시에는 18세기 정조 때 즈음 그려진 초창기 책가도를 필두로 19세기 궁중화원 이형록이 그린 책가도 등 역사적 가치가 있는 명품들이 수두룩하다. 최초 공개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경기도박물관, 제주대박물관, 서울미술관 등 국공립박물관과 사립미술관, 화랑 등 20여 곳에 비장된 걸작 58점이 나왔다. ‘자수 책거리’ 병풍과 ‘강원도 문자도’ ‘제주도 문자도’ 등 지역별로 특색있는 문자도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다. 제주도 문자도는 글자 안에 파도 무늬를 넣었다. 개인 컬렉터들의 안방에 모셔두던 작품까지 나올 수 있었던 건 현대화랑 박명자 회장이 지원한 덕분이다.
세계로 수출할 수 있는 K-한류, 미국 순회전 예정
이번 전시는 책가도를 국제용으로 자리매김시켜 뜻 깊다. 책가도는 단색화를 이어 세계에 수출할 한류 미술상품이다. 무엇보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역사적 맥락을 가졌다.
정병모 한국민화학회 회장(경주대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책가도의 근원은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귀족들이 스튜디올로(개인서재)를 만들었고, 이것이 독일, 영국, 프랑스 등으로 퍼져 서재와 컬렉션 보관을 겸하는 ‘호기심의 방’이 됐다. 이는 17세기 선교사를 통해 중국으로 전해지며 ‘다보각경(多寶各景)’ 문화를 만들었다. 다보각이라는 장식장에 도자기, 청동기, 옥 등의 귀한 물건을 진열해 놓은 것을 그린 그림이다. 정조 때 이것이 유입돼 한국화한 것이 책가도이다.”
18세기 초기 그려진 책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안경, 자명종, 중국산 고급 도자기, 공작 깃털 펜 등 수입산 귀한 물건이 함께 진열돼 있는 것이 그런 방증이다. 책가도야말로 세계를 향한 창인 것이다. 윤 전 교수는 “책거리 그림이야말로 국제경쟁력이 있는 소재”라고 말했다.
8월 28일까지의 서울 전시가 끝나는 대로 9월부터 1년간 미국 순회전에 들어간다. 뉴욕 스토니부룩대학교 찰스왕센터, 캔자스대학교 스펜서박물관, 클리블랜드미술관 등에서 전시가 이어진다. 벌써부터 외국에서 그 진가를 알아주고 있다. 일반 8000원, 어린이·청소년 5000원.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