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용선료 협상, 새로운 역사를 쓰다

입력 2016-06-12 06:06
가보지 않은 길을 갔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현대상선의 용선료 협상 이야기다.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세계적인 선주들에게서 뱃삯을 내려달라고 요구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협상을 이끈 한 고위관계자는 “은행이나 채권자들은 이자를 깎고 원금을 유예하는 일에 아주 익숙한데, 선주들은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었다”고 협상 초기의 어려움을 전했다. 아직 세부적인 조정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지나온 과정을 돌아보면 협상의 교과서에 나올만한 성공요인들이 있었다.

시한을 설정하라

올해 1월 용선료 협상이 시작됐지만 좀처럼 진척이 없었다. 겨우 협상에 응한 선주들은 용선료 일부를 유예하는 대신 산업은행 등 한국의 채권단이 지급보증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협상이 더 이상 진척되지 않는 상태에서 시간만 흘렀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4월26일 공개적으로 선주들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협상 시한을 제시했다. 그는 “용선료 협상을 마냥 기다릴 수 없다”면서 “5월 중순까지 협상이 이뤄지지 않으면 채권단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사실상 법정관리 뿐이다”라고 못 박았다. 이 시한은 다시 5월 20일, 5월 말, 6월 초까지 연장되었지만, 지지부진했던 협상을 진척시키는데는 효과를 발휘했다.

한 관계자는 “처음 5월 중순이라고 제시했을 때는 1주일 정도 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결국 6월까지 넘어와서 협상이 타결될 수 있었다”며 “2014년 이스라엘 짐라인의 협상에 1년이 걸린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속도전을 벌인 셈”이라고 자평했다. 애초 현대상선이 채권단에 제시한 협상 시한이 올 상반기, 즉 6월까지였다.



진짜 목표를 숨겨라

채권단에서는 협상의 목표를 용선료 30% 절감이라고 제시했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처음부터 30%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채권단의 목표는 현대상선의 부채비율을 400%아래로 낮추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성동격서 전략을 쓴 셈이다.

선주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나오스 나비오스 조디악 등 주요 선박회사들은 현대상선에 으름장을 놓고 있었지만, 이들도 선박펀드를 비롯한 투자자와 은행에 빚을 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부 선주들은 과거 STX팬오션의 법정관리로 용선료를 떼인 경험이 있어 현대상선의 협상에 응하고 싶은 것이 속내였지만, 투자자나 다른 선주들의 눈치 때문에 머뭇거렸다. 외국의 해운 전문 매체들은 “선박회사들이 투자자와 해운사들 사이에 끼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보도했다. 결국 선주들도 초기의 완강한 입장은 협상용이었고, 결국 최근의 시세보다 나은 가격에 절충을 했으니 최악의 상황은 피한 셈이었다.



돌발변수는 유리하게 활용하라

5월13일 독일 해운사 하팍로이드는 새로운 글로벌 얼라이언스(해운동맹) 결성을 발표하면서 현대상선을 제외됐다고 공개했다. 이를 하루 앞서 알았던 채권단 관계자는 “눈 앞이 캄캄했다”고 말했다.

정부와 채권단은 협상 초기 해운동맹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4월에 들어서서 해운동맹 재편 소식이 들려오면서 다급해졌다.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이 해운동맹에서 탈락하면 부산 인천 광양 등 항만산업도 위기에 처하게 되고 수출은 물론 이미 위기에 처한 조선업에도 직격탄이 될 수 있었다.

이 관계자는 “동맹에서 탈락한게 아니라 유보된 것이고 경영이 정상화되면 가입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돼 상황은 알려진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며 “주말을 지내면서 생각해보니 동맹 탈락이 협상에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으니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채권단은 이를 용선료 협상에서 선주들을 압박하는 카드로 활용했다.



정보를 관리하라

현대상선 홍보팀은 협상 과정에서 언론 보도가 나올 때마다 울상을 지었다. “협상이 난항에 빠졌다”는 보도는 물론이고, “진척이 이뤄졌다”는 보도에도 질겁했다. 5월 중순 한 언론은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하며 일부 선주가 용선료 인하에 합의했다고 공개했다. 협상 관계자는 “이 보도를 보도 다른 선주들이 ‘왜 우리에겐 더 나쁜 조건을 제시했으냐’면서 항의해 상황이 악화됐다”며 “선주들도 한국언론 보도를 예의주시하고 있어 협상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협상팀 입장에선 차라리 상황이 안좋다고 보도되면 협상엔 도움이 되는 면도 있었다”며 “반면 정부는 여론에 신경을 써야했고 채권단은 주가에도 민감해 협상이 진척될 때마다 이를 언론에 알리고 싶어해 엇박자가 났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1차 협상시한이 지난 20일 이후에는 협상 상황에 대한 일일보고를 받지 않고 구체적인 내용은 채권단과 현대상선에 일임했다. 이 때부터 마지막 고비를 넘어설 수 있었다.



행동으로 설득하라

마지막 변수는 영국 선박사 조디악을 협상에 응하게 하는 것이었다. 오랜 경험을 가진 영국 선주들은 용선 계약서에 ‘분쟁이 생길 경우 영국 법원으로 간다’는 문구를 넣을 정도로 치밀하다. 조디악은 이스라엘 해운재벌 에얄 오퍼가 경영주다. 2년전 짐라인의 협상 때와는 다르게 한국 해운사에는 완강한 태도를 보여 협상팀은 야속함까지 느꼈다.

압박이나 으름장은 통하지 않았다. 조디악 입장에서도 현대상선에 빌려준 가격이 현재 시세와 큰 차이가 나지 않아, 다른 해운사에 배를 옮겨주는게 차라리 나았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2가지 행동으로 조디악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첫째는 현정은 전 현대상선 회장의 눈물어린 편지였다. 1차 시한을 넘긴 지난달 23일쯤 현 전 회장은 조디악의 오퍼 회장에게 이메일을 보내 ‘나는 현대상선에서 물러나지만, 다시 살아날 수 있게 꼭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협상팀의 아이디어였던 이메일 호소는 조디악을 움직였다. 조디악이 처음으로 협상에 나서기로 했다.

그 직후인 지난달 27일 정부는 STX조선의 법정관리를 결정했다. 현대상선도 법정관리에 갈 수 있다는 강력한 신호였다. 결국 1주일전인 6일 현대상선과 조디악은 용선료를 낮추기로 합의했다. 협상팀은 이후 벌크선 용선료 협상을 마무리 짓고 9일 협상 타결을 선언했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2년전 세월호 참사 이후 해운업 관련 소식이 이토록 국민의 관심을 받은 것은 처음 ”이라며 “좋은 소식만은 아니지만, 국민들이 해운산업의 중요성과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