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소나기' 속편 책으로 나왔지만...

입력 2016-06-09 10:27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혀달라고….”

뭇 문청들의 사랑을 받았던 소설가 황순원(1915∼2000)의 단편 ‘소나기’의 마지막 대목이다. 소년과 소녀의 풋사랑을 다룬 이 단편은 소년이 소나기 오는 날의 추억을 가진 윤 초시네 손녀의 죽음을 부모가 주고받는 말을 통해 확인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소년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

문학과지성사는 ‘소나기’의 속편 격인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9일 출간했다. 9명의 후배 소설가들이 황순원에 대한 오마주로 쓴 단편을 엮은 것이다. 1963년에 등단한 전상국을 시작으로 2013년 등단한 조수경까지. 데뷔 연차로 무려 50년의 세월을 아우르는 작가들이다.

구병모의 '헤살', 손보미의 '축복', 전상국의 '가을하다', 서하진의 '다시 소나기', 김형경의 '농담', 이혜경의 '지워지지 않는 그 황토물', 노희준의 '잊을 수 없는', 조수경의 '귀향', 박덕규의 '사람의 별'이 그것이다.

구병모는 며칠 후를 상정했다. 윤 초시네 손녀딸이 떠나고 소년은 까닭 없이 며칠을 앓다가 일어났다. 그제야 터지고 해진 자신의 저고리에도 흙물이 묻은 걸 발견한다. 소녀를 등에 업었을 때 입었던 옷이다. 소녀의 분홍 스웨터에 묻은 흙물처럼 소년의 저고리에도 같은 물이 밴 것이다. 소년이 개울가에서 저고리를 흘려보냄으로써 비로소 소녀를 보낼 수 있었다.
이혜경의 글에선 소년이 중학교를 마치고 도시 공장에 취직하는 것으로 나온다. 어느새 점심을 먹고 나면 담배 생각이 나는 스물한 살 청년이다. 어느 날 동료가 잡지 한 권을 들고 왔는데, 잡지 속의 여학생 사진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단발머리에 하얀 얼굴 (중략) 살아 있다면 지금 꼭 이럴 것이다.”
전상국은 소녀와 자꾸 중첩돼 떠오르는 담임선생님의 모습에 혼란스러워하는 소년의 변화를 통해 사춘기 소년의 성장통을 그렸다. 박덕규는 판타지로 풀어냈다. 소녀는 실상 사랑의 감정 따위는 없는 먼별에서 온 사람이었고, 그녀에게 사랑은 죽음과 맞바꾼 감정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외친다. “이 옷만은 가져갈 거예요.”
서하진은 소녀가 떠난 지 3년 후의 일을 그렸다. 소년 김환에게 죽은 소녀와 너무나 닮은 전학생 윤희영이 나타난다. 외모며 행동 하나하나가 소녀를 떠올리게 하는 윤희영에겐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는데….

하나의 작품에서 파생된 아홉 개의 이야기는 저마다 다른 색깔로 원작을 변주한다. 그러나 후배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서도 결국 재확인하게 되는 것은 속편은 원작을 결코 따를 수 없다는 정설이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