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냉면 최고""아니다" 문인 입씨름 누가 이길까

입력 2016-06-08 17:27
강경애

나혜석

이상

김기림

윤동주 정지용 등 일제강점기 시인들의 시 초간본 인기는 원
본 소장욕
에 구애한 측면이 있다. 더불어 액정화면 터치가 대세인 시대에 누렇게 바랜 지면의 활자 글씨에 대한 향수도 크다.

그런 인기를 업고자 한 것일까. 나혜석, 이상, 김동인, 현진건, 김유정, 나도향, 이광수, 김효석, 채만식, 임화…. 한국 근대 문인들의 산문을 가려 뽑은 선집이 나왔다.

이름하여 ‘모단 에쎄이’(출판사 책읽는 섬). 표제에서부터 편집까지 근대 경성을 달구던 ‘모단’ 열풍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이 책에는 1910년대부터 1940년대 후반까지, 즉 일제강점기와 해방기에 작가 45명이 ‘조광’ ‘조선문단’ 등의 잡지와 신문에 기고했던 수필 90편이 수록됐다.

내밀한 목소리를 담는 수필이기에, 문단의 큰 별들이 털어놓는 음식, 여자, 친구 등에 관한 소소한 일상은 의외성을 띤다. 시대에 대한 울분과 토로가 느껍고, 동료애는 애끊는다.

평양냉면을 두고 평안도 태생의 월북작가 김남천과 강원도 태생 이효석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수필은 배꼽을 잡게 한다. 김남천의 평양냉면 자랑은 고집스럽기까지 한데, “도박에 져서 실패한 김에 국수(평양냉면) 한 양푼을 먹었다는 말이 우리 시골에 있다”고 전하는 그는 “서울서 횡행하는 국수(냉면)는 유사품”이라고 단정한다(‘냉면’). 이에 반해 이효석은 “평양에 온지 사 년이 되나 자별스럽게 기억에 남는 음식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며 “육수 그릇을 대하면 그 멀겋고 멋없는 꼴에 처음에는 구역이 난다”고 ‘유경(평양의 딴 이름) 식보’라는 글에서 타박한다.

현진건이 팬인 줄 알고 차 한 잔을 했던 여자가 기실은 사람을 착각해 일어난 에피소드라고 털어놓는 수필(‘거리에서 만난 여자’)에서는 소탈한 성품이 읽힌다. 시대를 풍미했던 문인이자 화가였던 나혜석. 그가 이혼하고 혼자 살 때 이야기는 우리들의 선입견을 돌아보게 한다. “고적이 슬프다고? 아니다. 고적은 재미있는 것이다. 말벗이 아쉽다고? 아니다. 자연과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나는 평온무사하고 유화한 성격으로 변할 수 있다.”(‘여인 독거기’) 그녀가 ‘임자 없는 독신’이라고 무시당하지 않고 주인집의 신용을 얻은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은 짠하다.

책에서 가장 마음을 사로잡는 글은 동료 문인에 대한 부고 글이다. 김기림은 ‘고(故) 이상의 추억’에서 “상은 한 번도 잉크로 시를 쓴 일이 없다.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것이다. 상을 잃고 나는 오늘 시단이 갑자기 반세기 뒤로 물러선 것을 느낀다”라고 썼으니 이보다 더한 상실감이 있을까.

이렇듯 김기림, 임화, 김남천 등 문단에서 한동안 지워졌던 월북 문인들이 글까지 아울러 문학사적으로도 스펙트럼이 넓다.
책을 엮은 방민호 서울대 교수는 “고통스럽고 마음이 공허할 때 그 ‘낡은 지면’들은 한 가닥 위안이었다”며 함께 읽기를 권한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