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땀 한 땀 수놓듯 그린 민화의 화려한 외출

입력 2016-06-03 16:19
'모란도' (2009), 순지에 분채 및 봉채. 학고재갤러리 제공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놓은’이라는 한 때의 유행어가 떠오른다. 열 폭 병풍마다 활짝 핀 모란. 풍만하면서도 단아한 느낌을 주는 절묘한 조합이다. 꽃과 잎의 형태는 단순하지만 검은 테두리 안의 붉은색, 푸른색의 번짐 효과가 아주 섬세해 단순함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민화는 민화인데, 전통 민화가 주는 투박한 맛과는 다른 기품이 있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서정 박무생 (68)씨의 개인전 ‘민화: 화려한 외출’전이 열리고 있다. 고미술에서 출발해 현대미술로 확장한 학고재에서도 민화전은 처음이다. 그런데 그 주인공은 이름난 민화 작가가 아니라 아마추어와 전문 작가의 경계에 서 있는 주부 작가다. 무명 작가들이 전통 민화를 그렸듯이 그 역시 화단에 처음 이름을 드러냈다.

박씨는 2007년 육순을 앞둔 나이에 불현듯 민화의 아름다움에 눈 떠 배우기 시작했다. 10년간 갈고 닦은 솜씨를 처음 대중 앞에 선보이는 것이다. 전시장엔 화조도 뿐만 아니라 문자도, 책가도, 심지어 호피도에 이르기까지 여러 화목(畵目)의 민화가 병풍, 액자 등 다양한 형태로 전시공간을 채운다.

그는 “얼굴을 드러내기가 부끄럽다”며 기자간담회도 마다했다. 하지만 완벽주의자적인 성정을 숨길 수 없는 필력이 한 점 한 점 공들인 작품에서 드러난다. 모란에서는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당당함이, 책가도에서는 장중함이 있다. 호피도는 한 올 한 올 세밀하게 그린 털이 살아 있어서 진짜 호피를 걸어둔 듯하다.

박씨의 색채 감각과 완벽주의적 성격은 표구에서도 드러난다. 작품과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을 천연염료에서 찾아내 장정했다. 표구까지 작품의 연장인 것이다.

민화는 조선 후기 왕실의 화려한 병풍에서 여염집 벽장문까지 두루 생활공간을 장식했던 그림이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문자도 앞에서 천자문을 외웠으며 화조도 병풍 앞에서 첫날밤을 밝히고 늙어서는 노안도 앞에서 손주의 재롱을 보았다.

현대 민화는 1970년대 초반부터 외국 수출용으로 그려지기 시작해 점차 민화 제작 인구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윤열수 가회민화박물관장은 “현재 민화를 그리는 사람들은 1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이 된다. 그들이 배운지 2∼3년만 되면 전시를 열어 인사동 화랑들이 민화 전시로 먹고 산다는 말이 나돌 정도”라면서 “박무생 작가는 배운 지 10년 만에 처음 전시를 가진 점이 놀랍다”면서 “정직한 실력을 갖춘 참신한 재야 고수를 발견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26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